푸드

옷장대신 그릇장을 채운 여자들

2016.03.16

옷장대신 그릇장을 채운 여자들

옷장 대신 그릇장을 채우는 여자들이 있다. 적절하고 아름다운 그릇은 한 끼가 가진 물리적 기능을 가치로 바꿔놓는다. 그릇은 맛을 이루는 재료이자 음식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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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에서는 맛볼 수 없고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쾌락으로 무엇이 있을까. <나 홀로 미식수업>의 저자 후쿠다 가즈야는 ‘식기’라고 말한다. 좋은 그릇을 즐기면서 식사를 하는 즐거움이다. 로얄코펜하겐이나 빌레로이앤보흐 같은 식기를 풀세트로 펼쳐놓는 테이블은 아니다. 자신을 충족시켜주는 그릇을 구입해 직접 사용하며 그릇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다가간다. 저자는 식당에서 맥락 없이 내놓는 그릇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집에서 식기를 갖추고 식사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집에서 대충 저장 용기를 꺼내 차리는 식탁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미식에 대한 관심이 그릇으로 옮겨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장비부터 구입하는 여타 취미 활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요리에 대한 관심이 선행되고 그 후 그릇으로 확장된다는 것. 프랑스 역사학자 장 루이 플랑드랭이 말했듯 요리하고 먹다 보면 안다. 음식 섭취가 곧 음미는 아니라는 걸 말이다. 좀더 바라보고 맡아보고 느낄 수 있는 한 템포가 필요하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에서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된 여자들은 이제 옷장 대신 그릇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더 트래블러> 여하연 편집장의 그릇 사랑은 업계에 유명하다. 직업상 출장이 잦은 그녀의 트렁크는 언제나 출발 당시보다 돌아올 때 더 묵직하다. 핀란드에서는 마리메꼬와 아라비아, 무민을 찾아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고 터키에서는 파샤바흐체를, 미국에서는 코렐 빈티지를 찾아 헤맨다. 빈티지 시장에 들러도 결국 손에는 컵과 그릇이 들려 있다. 지인들을 초대해 한 끼 식사를 즐기는 그녀의 손님상은 전 세계 곳곳에서 먼 길을 달려온 그릇으로 알록달록 가득 찬다. “일드 <심야식당>을 보고 요리에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만들어보다가 그릇도 사기 시작했어요. 그릇이 그래요. 테이블 세팅을 생각하게 되니 하나를 사면 또 다른 게 필요하고. 구입하면 또 다른 게 눈에 보이고.” 혼자 먹는 식탁도 예외일 수 없다. 배달 음식도 항상 그릇에 옮겨서 한 상의 식탁을 차린다. 음식에 어울리는 그릇을 골라 담아냄으로써 비로소 “내 식사”가 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연결 고리는 그릇으로 드러나는 숨길 수 없는 취향이다. 평소 화사한 프린트가 가득한 빈티지 원피스를 즐겨 입는 여하연 편집장의 그릇장은 화려한 색감의 북유럽 그릇이 가득 차 있다. 평소 블랙과 화이트 위주의 심플한 스타일을 즐겨 입는 사람의 그릇은 신기하게도 심플 그 자체다. 인테리어처럼, 가구처럼, 옷처럼 그릇 역시 자신을 드러낸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컨설턴트 김소현은 한 끼 식사를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이벤트로 만들기 위해 그릇을 구비하기 시작했다. 1년 전 독일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외식을 줄이고 집밥을 해 먹게 된 그녀는 매일 5시가 되면 그날 메뉴를 떠올리며 리넨을 꺼내고 수저받침을 놓고 어떤 그릇을 쓸까 고민하면서 1시간을 보낸다. 한국에서 이고지고 간 허명욱 작가의 옻칠 접시부터 근대화상회 도자기, 디앤디파트먼트의 스틸 트레이, 이천 사기막골 도자기촌에서 구입한 투박한 질그릇, 휘슬러 솔라 리빙 컬렉션의 머그와 수프 볼, 플리 마켓에서 구입한 빈티지 접시등이 그녀가 사랑하는 그릇이다. “이 시간이 저에겐 저녁 의식이에요. 다들 뭘 그렇게 갖춰놓고 먹느냐고, 설거지 귀찮지 않느냐고 하지만 음식이 완성되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게 그릇이에요. 전 식사하는 데 있어서 제 애티튜드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그리고 재미있어요. 그릇 쓰임새마다 카테고리를 나누어두긴 하지만 그 형식을 깨뜨려 재해석하는 걸 즐기기도 하죠.” 우리나라 찬그릇에 멕시칸 과카몰레나 살사를 담기도 하고, 채반에 바삭한 감자 요리를 올리는 등 ‘믹스매치’로 테이블에 즐거움을 더한다. 간혹 이자카야에서 사케를 주문하면 술잔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와서 어떤 잔을 사용하겠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어떤 술잔에 마실지 고민하는 순간, 술자리의 행복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릇을 고르는 일도 같다. 그릇은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식재료이기도 한 셈이다.

과거 엄마들의 그릇장이 손님들이 오지 않는 한 좀처럼 열리지 않던 것과 달리 요즘의 그릇 수집가들은 실용성도 고려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한식기로도 양식기로도 두루두루 사용할 수 있는 ‘화소반’ , ‘김선미 그릇’ 같은 생활 자기와 ‘큐티폴’ 같은 예쁘고 내구성 좋은 커틀러리를 구비해놓고 직접 사용하며 그릇의 존재 이유를 알아가는 식이다. 용도를 가진 도구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발휘할 때 음식은 더 맛있어진다. 그릇과 요리가 좋아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된 김보선은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직접 사용하다 보면 열 유지가 잘되는 도자기의 성질, 내용물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뚝배기의 성질 등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릇과 입술이 맞닿았을 때 주는 감촉, 커틀러리가 닿았을 때 그릇이 주는 미세한 진동 등은 그릇을 단순한 수단이 아닌 맛을 이루는 구성 요소로 인식할 때 비로소 찾아오는 즐거움이다.

이토록 가치 있는 그릇의 세계로 들어서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릇에 대한 대단한 애정이 없어도 된다. 마음에 드는 그릇을 하나 사는 것부터 시작이다. 다 귀찮다면 무인양품, 자연주의 같은 브랜드에서 솔리드 컬러의 접시부터 집어 들고 필요할 때마다 그 접시와 어울리는 그릇을 구비해나가면 된다. 우리는 모두 날마다 먹어야 산다. 매일 마주하는 접시에서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칼로리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담음새, 그릇에 얽힌 추억, 대화할 느긋한 여유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의 ‘쾌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음식의 마무리는 ‘깨’가 아니라 ‘그릇’이에요.”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이 들려준 명언이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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