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정유미,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서 볼 수 있어 행운이었죠”

정유미는 사소한 아픔에 매몰되는 대신 ‘사람’과 ‘관계’에서 행복을 찾는다.

패션 화보

정유미,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서 볼 수 있어 행운이었죠”

정유미는 사소한 아픔에 매몰되는 대신 ‘사람’과 ‘관계’에서 행복을 찾는다.

1930년대 할리우드 배우 캐서린 헵번에게서 영감을 받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2025 봄/여름 ‘아방 프리미에(Avant-Première)’ 컬렉션. 캐서린 헵번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을 넘어서는 배우였다. 작품에서도 독립적인 여성을 주로 연기했으며, 맨얼굴로 공식적인 자리에 등장했고,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 위대한 배우로부터 출발한 컬렉션을 독보적인 캐릭터를 가진 우리나라의 배우 정유미가 완벽하게 표현했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로고가 프린트된 깨끗한 하얀 티셔츠에 카디건을 스커트처럼 허리에 묶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정유미의 모습이 맑고도 도발적이다.

해체적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네 개의 스티치가 앞으로 오도록 거꾸로 입었다. 아방 프리미에 컬렉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정형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움직임과 제스처를 디자인에 그대로 투영해 서둘러 옷을 입거나 벗은 듯한 느낌을 준다. 상의를 하의처럼 입어도, 재킷이나 드레스를 뒤집어도, 충분히 아름답다.

1989년 첫 패션쇼에서 선보인 ‘타비 슈즈’가 크리스찬 루부탱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크리스찬 루부탱×메종 마르지엘라’의 타비 슈즈는 컬러와 힐 높이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주는데, 특히 푸르고 투명한 소재의 플랫 슈즈는 청아하기까지 하다. 하늘빛 셔츠와 데님 스커트, 푸른 눈과 표정의 정유미가 낯선 에너지를 더한다.

중성적인 수트에 날렵한 실루엣이 1980년대 펑크 문화를 연상시키는 ‘킨키스 부츠’를 함께 매치했다. 여기에 담담한 색깔과 단단한 소가죽 소재가 인상적인 ‘드레사주(Dress-Age) 백’으로 스타일링에 힘을 더했다. 성별의 경계를 허문, 절제된 우아함이 돋보인다.

마르탱 마르지엘라는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옷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옷이 시간과 기억을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철학은 아방 프리미에 컬렉션으로도 이어진다. ‘역속물주의’를 주제로 메종 마르지엘라는 이번 컬렉션을 통해 상류사회의 격식을 갖춘 옷차림보다는 시간의 흔적이 깃든 워크 웨어의 감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과감하게 사용한 상징적인 스티치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 러프한 마감의 베스트에서 그 미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빈티지한 느낌의 데님 재킷에 사랑스러운 셔츠를 착용해 균형감을 살렸다. 셔츠는 클래식한 체크 패턴에 시어한 원단을 레이어드한 디자인으로, 구조적인 실루엣과 신선한 미감을 실험한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질감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흥미롭다.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옷에 대한 메종 마르지엘라식 고민. 부드러운 색감의 아노락에 벨트를 더해 드레스처럼 연출했고, 크리스찬 루부탱과 콜라보레이션한 타비 슈즈로 관능적이면서도 드레시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두 가지 크기와 컬러의 드레사주 백. 승마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으로, 두 가지 길이의 가죽끈 디테일을 활용해 토트백, 숄더백, 버킷백 등으로 연출할 수 있다. 정유미처럼 두 개를 겹쳐 들거나, 클러치처럼 사용하거나, 어깨에 툭 걸쳐도 좋다. 의상과 액세서리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tvN 드라마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2024) 1화의 한 장면. 정유미가 연기한 윤지원은 운동복 차림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끼고 등장했다. 그때 날아오는 농구공!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그녀는 쓰러지고, 안경은 부러지고, 코피가 흐른다. 그런데 하필 그때 18년 전 첫사랑이 나타난다.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케세라세라>(2007), <로맨스가 필요해 2012>(2012), <연애의 발견>(2014) 등에서 보던 정유미가 돌아온 느낌이었다고 할까. 면접장에서 ‘토요일 밤에’에 맞춰 춤을 시연해야 했던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의 세진도 떠올랐다. 정유미의 여자들은 사랑과 현실에서 난처해질수록 호감을 얻었다. 그 모습이 보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의 윤지원 또한 그들 못지않게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여자였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 하지만 정유미는 의아해했다.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로맨스가 필요해 2012>와 <연애의 발견>은 진짜 로맨스였거든요. 그 안에 코미디 요소가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보는 분들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사랑은 외나무다리에서>가 로맨틱 코미디고, 그래서 이전 작품과는 장르가 다르다고 여겼어요.” 사실 정유미에게는 공에 맞아 코피까지 흘리는 장면이 처음이었다. 윤지원처럼 사랑에 익숙지 않은 여자도 처음이었다. “자세히 본 분들은 알았을 거예요.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주열매와 <연애의 발견>의 한여름은 연애 고수였거든요.(웃음)”

그러고 보니 로맨스의 중심에 놓인 정유미를 본 게 <연애의 발견> 이후 10년 만이었다. 그 사이 정유미는 <부산행>(2016), <라이브>(2018), <82년생 김지영>(2019), <보건교사 안은영>(2020), <잠>(2023)을 선택했다. 로맨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장르나 주제 면에서 뾰족한 작품이었다. <라이브>의 한정오는 취업 준비생의 고난에서 시작해 말단 경찰의 현실적 애환을 거치며 성장했고,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자라며 여성으로서 겪은 고통이 쌓인 끝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담아둔 말을 하게 된 여자였다. 그런가 하면 <부산행>과 <보건교사 안은영>은 장르의 확장을 시도한 작품이었고, <잠>은 공포 영화의 리듬으로 부부 관계를 고찰하는 영화였다. 하지만 정유미 자신이 스스로 애써 로맨스를 피한 건 아니었고, 일부러 뾰족한 작품만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관된 기준은 없어요. 그때 제가 놓인 상황에
맞춰서, 제가 재미있었던 작품을 선택한 거예요.” 지난 시간을 더 촘촘히 펼쳐놓고 보면 그녀의 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나라에서>(2012), <우리 선희>(2013)를 통해 홍상수 감독의 세계관을 거쳤는가 하면 <겨울의 피아니스트 >(2012), <산나물 처녀>(2017) 등의 단편영화에도 참여했다. 일관된 기준이나 고도의 전략 아래 선택했다고 예단하기에는 분석되지 않는 행보다. 그때 정유미가 가진 호기심과 느꼈던 재미가 지금의 정유미로 이끌었다고 볼 수밖에. 현재 정유미가 대중과 만나는 또 다른 자리인 나영석 PD의 예능 프로그램 또한 그렇다.

“벌써 8년이나 됐더라고요.” 2017년 <윤식당>으로 시작해 2024년 <서진이네 2>까지, 정유미는 나영석 PD의 프로그램에서 또 하나의 역할을 구축했다. 물론 처음부터 예능 프로그램에 큰 뜻을 품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재미만으로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윤식당>에 처음 참여한 이유는 윤여정 선생님 때문이었어요. 선생님은 평소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싶어서 했죠.” 그 후 윤여정이 없는 프로그램까지 참여한 이유는 ‘사람’이었다. 8년 사이에 함께한 스태프들과는 언제든 “밥 먹으러 가도 돼요?”라고 물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일종의 ‘거울 치료’를 경험했다. “이전에는 제가 연기하는 모습만 TV로 봤잖아요. 그래서 처음 제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는 당황했어요.(웃음) 왜 저렇게 말하는 거지? 왜 저런 표정을 짓지? 사실 그게 저잖아요. 덕분에 고쳐야 할 부분을 상기하는 계기가 됐죠.” 무엇보다 정유미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깊어졌고 일에 대한 고민도 더해졌다.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들을 곁에서 볼 수 있어 행운이었죠. 어떻게 이들은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찾아보게 됐거든요. 치열하게 고민한 시간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지금 그녀가 일에서 찾는 가장 큰 즐거움도 ‘사람’과 ‘관계’다. 때론 사소한 아픔에 매몰되어 괴로워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과 팀을 이뤄 작품을 완성하면서 다시 행복해졌다. “배우라는 직업은 새로운 동료를 자주 만나잖아요. 그들과 팀워크를 발휘할 때가 제일 좋아요. 그래서 현장에 갈 때도 출근이라기보단 팀원들을 만나러 간다고 여겨요.”

20년 차 배우 정유미는 해보지 않은 것과 가보지 않은 길에 의지가 점점 강해지는 중이다. “아직 사극이나 액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어요. 데뷔할 때도 액션 배우가 꿈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소림축구>에서 조미가 연기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저 킥복싱도 좋아하는걸요.” 극 중 정유미가 넥 클린치-니 킥으로 적을 제압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새롭고, 보고 싶은 그림이다. (VK)

포토그래퍼
김희준
디지털 디렉터
권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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