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가을/겨울 런던 패션 위크 DAY 3~4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는 문구를 완성하는 말은 다양합니다. 마틴 스콜세지는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 했고, 칼 로저스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 했으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남긴 캐롤 허니시도 있죠.
런던 패션 위크 3, 4일 차를 장식한 디자이너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문구를 완성해냈습니다. 거창한 주제를 내세우는 대신 내면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였죠. 누군가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지나온 여정을 돌아봤습니다. 아티스트와 비전을 공유한 이도, 마주한 현실에 대한 태도를 다진 이도 있습니다. 옷은 이들과 세상을 잇는 멋진 매개체가 되어주었죠. 그 결과물은 때로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창의적이었고, 때로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보편적인 공감대를 자아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화두를 던진 오늘의 쇼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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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린 두얀코트(@paulinedujancourt)
파울린 두얀코트가 마침내 런웨이에 섰습니다. 2024 LVMH 프라이즈 최종 후보이자 시몬 로샤와 피비 잉글리시에서 니트웨어 컨설턴트로 일했던 그녀의 경력을 몰랐다면, 아마 완성도와 기술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테죠.
두얀코트는 뜨개질을 가르쳐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패션 위크가 보통 할머니 생신(2월) 무렵에 열려요. 쇼를 하게 된다면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라고 밝힌 것처럼요. 룩 곳곳에 피어난 크로셰 꽃도 이맘때즘 꽃을 피우는 할머니의 화분에서 따온 모티브입니다. 컬렉션은 한마디로 시적이었습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섬세한 모헤어 패턴, 한데 얽힌 리본과 시폰, 푹신한 빅토리아풍 스커트와 숄 니트 등 각 요소가 부드럽게 얽히며 동화적 감수성을 자극했죠. 크로셰 꽃을 포함한 모든 룩은 수작업으로 완성했습니다. 두얀코트는 쇼가 끝난 후 손가락이 아프다는 귀여운 소회를 남기기도 했죠. 수년간의 연마와 몇 번의 프레젠테이션 끝에 피어난 두얀코트의 첫 런웨이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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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뎀(@erdem)
패션계에서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에르뎀 모랄리오글루(Erdem Moralioglu)와 화가 케이 도나치(Kaye Doachie)의 이번 만남은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10년 전, 모랄리오글루가 같은 영국왕립예술학교(RCA) 출신인 도나치에게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 말레인(Marlene)의 초상화를 의뢰한 적이 있거든요.
물빛 여인의 모습이 그려진 드레스, 오프닝 룩만 봐도 알 수 있듯 도나치의 초상화는 감성을 자극합니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 추상적 표현을 통해 인물의 분위기를 담죠. 어떤 면에서 모랄리오글루도 초상화가나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 칼라스, 드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등 25년 가까이 다양한 여성을 뮤즈 삼아 옷을 지어왔죠. 물론 그의 영원한 뮤즈는 어머니고요. 분야는 다르지만 접근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셈입니다. 교감에 가까운 협업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죠.
1950년대 스타일의 드레스와 수트, 코쿤 코트 등 모랄리오글루의 옷은 도나치의 캔버스가 되었습니다. 몽환적인 얼굴과 즉흥적인 터치가 느껴지는 꽃, 생생한 붓질의 질감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색의 향연이 끊임없이 이어졌죠. 특히 직접 손으로 염색한 오간자 드레스는 남다른 여운을 선사했습니다. 아름답다는 추상적 표현이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컬렉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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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로샤(@simonerocha_)
시몬 로샤가 브랜드를 창립한 지 15년이 흘렀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기 좋은 타이밍이죠.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시몬 로샤가 걸어온 발자취를 동시에 곱씹었습니다. 고향 더블린에서 입었던 교복과 교장 선생님이 들려주던 토끼와 거북이 우화, 지금의 시몬 로샤를 있게 한 시그니처 모티브를 솜씨 좋게 버무렸죠. 2018 가을/겨울 쇼를 선보였던 런던의 골드스미스 홀에서요.
어렵게 꼬지 않았습니다. 자물쇠 디테일에서는 학창 시절 모든 불량한(!) 일이 벌어지는 자전거 주차장을, 풍성한 인조 모피 아이템에서는 토끼를 떠올렸죠. 프릴이 달린 럭비 셔츠와 브로그, 거북이 모양 클러치와 드레스 실루엣, 가죽과 리본, 풍성한 볼륨감까지, 룩 하나하나 빈틈없이 빼곡했습니다. 배우 김민하와 알렉사 청, 피오나 쇼 등 캐스팅에도 각별히 신경 썼더군요. 이들이 지닌 확고한 개성과 캐릭터는 시몬 로샤의 기억과 동화적 판타지가 묻어난 룩에 ‘현재’라는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차근차근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며 런던 패션 위크의 기둥과도 같은 하우스로 거듭난 시몬 로샤. 앞으로의 15년이 더욱 궁금해지는 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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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카자나(@paolocarzana)
제목은 ‘도축장의 날개 없는 용(Dragons Unwinged at the Butchers Block)’, 룩은 14개, 장소는 런던의 역사적인 펍인 홀리 타번(The Holy Tavern)이었습니다. 자신의 집 뒷마당을 무대 삼았던 지난 시즌 쇼보다도 아담한 규모였죠. 옷은 재봉틀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옷감을 그대로 감싸고, 찢고, 뭉치고 또 묶은, 손맛 나는 디테일로 가득한 옷들이 술집을 유유히 오갔죠. 모든 요소가 급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혼란한 세상과 패션 시스템의 붕괴에 직면한 절망을 표현한 걸까요? 아니면 반대로 힘든 상황 속에서도 마법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용기와 희망을 담은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입니다. 파올로 카자나는 지금 AI에 맞서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도 끊었죠. “제가 하는 일은 모두 손으로 하는 일이에요. 우리의 지성과 창의성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리기 위한, 일종의 투쟁이죠”라면서요. 그런 면에서 컬렉션 제목은 선언문이나 다름없습니다. 용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상상력이나 정체성을 상징하죠. 파올로 카자나는 종종 알렉산더 맥퀸과 비교되곤 합니다. 기득권에 맞서 자신의 비전과 시대정신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요(실제로 그는 알렉산더 맥퀸이 설립한 사라반드 파운데이션(Sarabande Foundation)의 레지던트 아티스트이기도 합니다). 파올로 카자나가 수공예로 펼쳐낸 마법 같은 풍경, 그 뜨거운 마음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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