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와 실험의 나날, 하종현의 모든 것
어느 미술 작가의 초기작과 마주한다는 것만큼 특별한 경험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질 뻔한 옛 작업들을 현재에 만나는 것은 어떤 작가의 초심을 들여다보고 과거부터 현재까지를 능동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유의미한 기회죠. 오는 4월 2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하종현 개인전 <하종현 5975>를 통해 저는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암호 같은 제목의 숫자로 짐작할 수 있듯, 이번 전시는 하종현이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59년부터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접합’ 연작을 시작한 1975년까지 초기 작품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불세출의 화가가 다루어온 물질과 회화적 기법이 당시 한국 현대사의 격동에 어떻게 반응해 진화했는지 살펴볼 기회인 셈이죠. 아무리 땅에서 솟아난 듯 보이는 쿨한 작품도 시대의 흐름과 무관한 것은 없으니까요.





단색화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하종현은 일평생 회화의 가능성을 스스로 질문하고, 또 스스로 답을 찾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접합’ 연작이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는데요. 이번 전시는 어떤 실험과 도전이 어떻게 현재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한 근거 있는 단서가 될 것 같습니다. 젊은 작가 하종현이 전후의 혼란과 불안한 시대 상황을 직면한 과정(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엥포르멜), 가속화된 도시화를 겪으며 전통과 현대를 융합한 과정(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 한국만의 아방가르드를 표현한 시기(3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새로운 미술 운동 시기), 그리고 마대 자루 뒤에서 앞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특유의 방식을 고안한 시기(4부: 접합-배압법)까지. 하종현의 초기 작업이 어떤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 직조되었는지, 그 여정이 시기별로 펼쳐집니다.
하종현만큼 현재 미술 시장과 미술 역사에서 공히 주목받는 작가도 흔치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접합’ 연작 화면에 재료와 물성에 대한 철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하종현의 작업을 보니,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동시대적 기운으로 넘쳐나는 놀라운 작품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두꺼운 물감과 불에 그을린 표면, 어두운 색조 등으로 전후의 시대적 불안을 화면 위에 구현하고 있습니다.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 패턴은 당시 한국을 휩쓴 도시화된 경관의 역동성을 상징하죠. 그리고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했을 당시 그는 스프링, 철망, 신문, 휴지 등 비미술적 재료를 활용해 전위적인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하종현 작가는 늘 서양미술가들이 하지 않는 방식, 선택하지 않는 재료를 찾아 그들과는 다른 방식과 정신으로 작업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실험의 나날이 존재했기에, 이러한 역사에서 비롯된 ‘접합’ 연작이 시대의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군요.




1935년생인 하종현 작가의 실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배압법을 활용하는 건 비슷하지만, 색감과 물성, 붓 터치와 작업 방식 등을 달리한 ‘접합’ 작품이 세상에 나오고 있죠. 어떤 회화는 매우 가볍고 경쾌하며, 또 어떤 회화는 묵직하고 웅장합니다. 작가가 한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할 때 작업이 비로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하종현이라는 작가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종현이 거장이라 불린다면, 그가 회화, 더 나아가 예술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한 번도 멈춘 적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3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하종현 개인전에서는 아트선재센터에 자리한 초기작에서 시작해 지금에 이르는 근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종현 대(對) 하종현’이 아니라 ‘하종현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이 2025년 봄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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