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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이고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최고죠” 알레산드로 미켈레

2025.03.21

“구식이고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최고죠” 알레산드로 미켈레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발렌티노를 위한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비전.

레드는 발렌티노 세계의 중심이다. 하지만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발렌티노 로마 본사 사무실에서 모델 알리 댄스키를 마주하며 보이는 모든 것이 아주 밝을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이 브랜드 주변의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좋아합니다. 이런 소소한 것이 소중하죠.”
미켈레가 발렌티노 디자인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방식은 로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곳은 신과 관련이 있지만 퇴폐미, 번영, 로맨스와도 연관된 곳입니다.” 그는 고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 결과는? 천상계에서나 볼 수 있는 옷.

1970년대 로마에서 성장한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의 가장 큰 취미는 어머니의 옷장을 뒤져 바스락거리는 태피터, 반짝이는 스팽글과 그 시절 유행하던 장식을 손으로 쓸어보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영화 제작사 임원의 비서로 일했다. 화려한 자기표현이 필요한 직업이었다. 특히 어머니의 드레스 한 벌이 어린 미켈레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발렌티노 스타일의 이 크레이프 드 신 드레스는 하이넥 롱 원피스였고, 직선으로 떨어지는 라인을 보며 미켈레는 양초를 떠올렸다. 드레스 앞면은 완전히 블랙이었고, 어머니는 이 드레스가 시크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뒷면에는 우아하면서도 파격적인 핑크색과 라일락색 나비가 큼지막하게 수놓여 있었다. 이는 반전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시사했다. 어머니가 시사회에 입고 갈 드레스라고 설명했지만, 그 말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멋진 세상에서 그것을 입었단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그가 훗날 회상했다.

옷장 탐색이 시작된 지 40년 후, 미켈레는 지난해 또 다른 의류 보물 창고인 발렌티노 아카이브를 손에 넣었다. 2024년 봄, 그가 발렌티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미켈레는 로마 미냐넬리 광장의 르네상스 후기 궁전에 자리한 발렌티노로 출근하는 첫날부터 옷, 신발, 건축적 기준에 위배될 만큼 가볍고 정교하게 만든 오브제로 가득 찬 창고에 빠지고 말았다. 2022년 말까지 거의 8년 동안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한 미켈레는 완벽한 큐레이터로 인정받았다. 그는 빈티지와 보헤미안 스타일로 브랜드를 재편했고, 영국 교회 바자회나 이탈리아 귀족의 헌 옷장에서 가져온 듯한 옷을 자신의 마니아들에게 선보였다. 발렌티노 아카이브와 놀라운 콘텐츠를 뒷받침해줄 노하우로 무장한 노련한 장인들 덕분에, 미켈레는 칭찬 세례가 쏟아지던 전임자의 물질적 유산을 손보고, 따져보고, 재구성해 상상력을 발휘할 전례 없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가을 어느 토요일 오후. 아카이브에서 첫날을 보낸 후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미켈레는 파리 방돔 광장의 발렌티노 사무실로 출근했고, 다음 날 오후 공개될 이 레이블의 첫 번째 기성복 패션쇼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액세서리와 신발, 밑단 길이나 네크라인에 대한 막판 조율만 남았다. 미켈레는 높은 천장에 금박 석고로 장식된, 한때 웅장한 접견실로 쓰인 공간의 한쪽 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터번, 안경, 가방 같은 액세서리가 가득 놓여 있었고, 고양이 모양 도자기 장식품처럼 보이는 클러치도 있었다. 팀원들이 그와 나란히 앉아 있고, 그의 파트너 지오반니 아틸리(Giovanni Attili)는 뒤에서 맴돌고 있었다. 공간 맨 끝에는 거대한 거울이 대형 액자 거울 앞에 놓여 있었다. 거울을 통해 모델이 한 명씩 미켈레를 향해 걸어가면 의상 앞뒷면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블랙 하이 네크라인과 생동감 넘치는 자수 나비의 어울림, 즉 의상 내부의 일관성과 파괴적 면모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분위기는 차분했다. “엉망진창이죠.” 내가 미켈레와 그의 팀 곁으로 가자 그가 농담을 던졌다. “거의 다 끝났으니까 조금 쉴수 있을 거예요.” 지난 11월 52세가 된 미켈레는 청바지와 타탄 체크 셔츠, 빨간색과 흰색 조합의 반스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카라 바조 그림 속 그리스도처럼 그의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내려앉아 있었고, 양쪽에 느슨하게 땋은 머리가 늘어져 있었다. 카메오 팔찌, 반짝이는 디아망테, 뱅글 등 여러 개의 팔찌가 그의 팔목에 수북했다. 그래서 뭔가 할 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델들 역시 유별난 풍성함을 추구하는 미켈레의 미학에 따라 스타일링하고 있었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보세요.” 그가 한 모델에게 지시했다. 그녀는 발렌티노 아카이브에서 나온 것과 같은 패턴이 들어간 실크 클로케 원단의 밤색 종아리 길이 스커트, 하이넥 블라우스, 모피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금색 스팽글이 달랑거리는 존 레논 스타일의 선글라스와 함께 래퍼의 트로피와 공작 부인의 귀중한 가보를 합친 듯한 빛나는 펜던트가 달린 육중해 보이는 골드 체인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기 어렵나요?” 또 다른 모델은 흰색 레이스 타이츠, 스팽글 테디, 러플 장식 조젯 크레퐁 네글리제 드레스에 검정과 금색 스트랩이 달린 슈즈를 신고 있었다. 이것은 베벌리힐스 호텔에서 늦은 오후 룸서비스로 캐비아와 굴을 주문해 먹을 때 어울리는 의상이었다. “계속 걷는 게 더 낫겠어요.” 미켈레가 동정하는 어조로 모델에게 말했다.

또 다른 모델이 보수적인 스타일의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회색 하이 웨이스트 테일러드 바지와 박시한 크림색 물방울무늬 재킷 차림이었다. 45년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의상을 디자인하다 2008년 은퇴한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수십 년 전 직접 만든 빨간색 새틴 리본이 이 재킷을 고정하고 있었고, 흰색 자수 물방울무늬로 포인트를 준 우아한 검정 망사 장갑도 함께 매치했다. 이 룩의 코스프레 같은 분위기가 아랫입술에 낀 초승달 모양 S&M 주얼리와 황소에게 맞을 듯한 거대한 디아망테 노즈 링을 비롯한 여러가지 펑키한 액세서리로 어느 정도 상쇄되고 있었다. 누군가가 하트 모양 얼굴과 긴 갈색 머리의 이 모델이 이자벨 아자니와 닮았다고 말하자, 그녀 주변에서 왁자지껄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녀가 발그레한 얼굴로 활짝 웃는 바람에 입술에 낀 주얼리가 떨어지고 말았다.

미켈레와 팀원들은 몇 시간 동안 일에 전념했다. 미켈레 역시 이른 저녁으로 먹은 얇은 프로슈토 몇 조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피곤하세요?” 한 층 위에서 노란 발렌티노 스웨터를 입고 목에 줄자를 걸친 채 조정 작업을 하던 재봉 팀 책임자에게 그가 물었다. 미켈레에 따르면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지휘한 작업의 품질은 천상계 수준이었다. 그가 밝은 청색 물방울무늬의 시폰 소재 스트랩리스 롱 드레스를 보여주었다. 가슴 부분엔 가로로 주름이 잡혀 있고, 드롭 웨이스트에는 풍성한 러플 장식이 있었으며, 그 아래부터는 좁은 플리츠의 기둥 모양 치맛자락이 무릎 아래로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미켈레는 다양한 주름에 대해 설명했다. “정말 복잡합니다. 종이접기 같죠.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은 엔지니어처럼 구체적인 방식을 꿰고 있습니다.” 나는 미켈레가 왜 3인칭으로 표현하는지 궁금했다. 이 드레스는 아카이브 작품을 그대로 재현한 것일까, 아니면 새롭게 만들어낸 것일까?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작품일까, 아니면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작품?

“내가 함께 만든 가라바니의 작품이죠.” 미켈레가 답했다. “그의 작품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살짝 다르게 만들어보려고 했죠. 때로는 똑같이 재현하려고 해요. 너무나 매력적이니까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드레스 한 벌에 저와 가라바니 둘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 드레스는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것은 다이애나 비의 1980년대 초반 스타일에서 찾아볼 법했다. “마음에 쏙 들어요. 그 옷은 이 시대에는 한물간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구식이고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최고죠.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나면, 그 옷은 완전히 패셔너블한 것으로 추앙받을 거예요.”

다음 날 오후, 구식에서 완전히 현대적인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발렌티노가 늘 그랬던 것과는 달리, 파리의 세련된 중심지가 아니라 행사를 위해 새로 단장한 파리 외곽의 어느 공간에서 패션쇼를 진행했다. 엘튼 존, 해리 스타일스, 하리 네프를 비롯한 미켈레의 손님과 친구들은 깨진 거울이 바닥재로 깔린 곳으로 들어가, 먼지투성이 시트로 뒤덮인 안락의자와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아한 유령이 출몰하는 리노베이션을 기다리는 황폐한 저택 같았다. 17세기에 인생의 유한함을 노래했던 파사칼리아 델라비타(Passacaglia della Vita)의 애잔한 사운드트랙에 맞춰 모델 군단이 관객 사이를 조심조심 걸어 다니며 풍성한 브로케이드, 드레이핑 모피, 부푼 시폰, 섬세한 레이스, 반짝이는 스팽글, 흐드러지는 주름을 가까이에서 보여주었다. 패션쇼가 3분의 2 정도 진행되었을 때 파란색 드레스가 등장했다. 그 의상을 입은 모델은 화장도 머리 손질도 거의 하지 않았다. 엄마 옷장에서 드레스를 막 걸치고 나온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워킹하자 드레스가 아래로 곧게 떨어졌고, 조각난 바닥에 비친 그 소용돌이치는 치마의 시폰 장식이 푸른 불꽃처럼 아련히 빛나며 생동감 있게 펄럭였다.

거의 두 달 후, 나는 미켈레의 로마 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19세기 더블 데스크와 옐로 새틴 쿠션이 놓인 18세기 데이베드로 꾸민 공간은 16세기 후반의 격자형 천장부터 19세기 벽화, 1980년대에 발렌티노 가라바니가 시공한 모조 부아즈리(Boiserie) 벽지까지 이 공간의 과거 주인들이 부여한 다층적인 의미를 품고 있었다. “아름다운 천장과 기이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미켈레가 자신의 공간을 소개했다. “질서 정연한 것보다 뒤죽박죽인 것을 좋아해요.” 그는 지금은 빈티지가 된 발렌티노의 부아즈리 벽지가 덮고 있는 지난 세기의 유물을 탐구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나는 2016년 봄 로마에서 미켈레를 처음 만났다. 그가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오늘 아침에 만난 미켈레는 그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때와 같은 풍성한 수염에, 5:5 가르마를 탄 채 부러울 정도로 굵고 짙은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타이트하게 땋고 있었다. 눈에 띄는 유일한 다른 점은 손가락을 장식한 보석이었다. 8년 전 미켈레가 끼던 여러개의 은반지가 따뜻하게 빛나는 앤티크 골드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버건디 컬러의 캐시미어 스웨터와 굵은 골이 진 브라운 코듀로이 배기 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18세기 신고전주의풍 카메오 목걸이, 작은 천연 진주 목걸이, 프톨레마이오스 후기 스타일의 꽃 장식이 달린 긴 청록색 세라믹 구슬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그는 아무 때나 착용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밥 먹다가 흘리면 2000년 동안 잘 막아왔던 피해를 입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켈레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다. 개방적이고 매력적이며 지적 호기심이 넘친다. 그의 절친한 친구 엘튼 존은 이메일을 통해 “그와 잠깐만 같이 있어도 다른 사람과 사흘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랍니다”라고 알려주었다(존은 사진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미켈레의 또 다른 매혹적인 특징도 언급했다. 이를테면 미켈레는 거의 200년 전 피렌체 약사 산타 마리아 노벨라가 처음 제조한 향수를 애호한다). 구찌를 진두지휘하던 시절, 미켈레는 레드 카펫에서 자레드 레토나 해리 스타일스 곁에 서 있어도 아주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13년간 일한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임명되기 전, 그는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프리다 지아니니의 2인자로 일했을 뿐 아니라 1990년대에 구찌를 1970년대 스타일의 감각적인 세련미와 일맥상통하는 브랜드로 바꿔놓은 톰 포드 밑에서도 일했기 때문에 브랜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르네상스 장식,
바로크 드라마, 20세기 펑크를 비롯한 수십 가지 영향력 있는 요소에 매료된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추가했다.

처음에는 미켈레가 재해석한 구찌를 경계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평가와 소비자 모두 그의 비전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미켈레의 물불 가리지 않는 창의력은 견고한 직업의식과 연결되어 있었다. “미켈레의 큰 비밀은 함께 있으면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늘 농담을 하지만, 늘 진중하죠.” 지난 20년간 미켈레과 함께 일해온 미켈라 타푸리(Michela Tafuri)의 말이다. “정말 활력이 넘치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꽤 질서 정연한 뭔가가 있어요. 조직적이고 정확한 면이죠. 그가 늘 뒤죽박죽인 건 아니에요.” 미켈레의 로마 이웃이자 친구이며 영화 제작자인 지네브라 엘칸(Ginevra Elkann)은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미켈레의 조직력과 헌신이 구찌의 모회사 케어링에 큰 성과를 안겼다. 그가 부임하기 전 40억 유로에 그치던 구찌의 매출은 2022년 말 미켈레가 회사를 떠날 무렵 약 100억 유로로 증가했다. “더 이상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은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죠. 자연스럽지 않았어요. 천천히 성장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자신이 성장하는 방식에 신경 써야 합니다. 신체와 같아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창의적으로나 미켈레에게 그런 속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늘 같은 사람들과 비행기를 타고, 호텔에서 지내면서, 그 공간에 갇혀버린 재소자가 될 위기에 놓여 있었죠. 저는 거품 속에 붕 떠 있었습니다.” 반면 발렌티노의 매출은 구찌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구찌에 비하면 부티크를 운영하는 수준이다.

화려한 장식, 호화로움, 로맨틱 등 발렌티노 코드가 담긴 미켈레의 디자인. 발렌티노 특유의 스타일에 2025년을 찬미하는 멋스러운 스트리트 스타일의 에너지까지 더했다.

‘1년간의 경쟁업체 이직 제한 계약’으로 조용히 지낸 미켈레는 다른 대상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중세 탑으로 유명한 로마 팔라초의 한 아파트를 복원했다. 현재 그곳에는 르네상스 회화와 델프트 도자기로 만든 채유 타일 같은 미켈레가 수집한 오브제로 가득하다. 그는 로마 북부 라치오(Lazio)의 성도 복원했는데, 그곳에서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양돈 농장으로부터 그 성을 구하기 위해 꽤 넓은 땅을 매입했다. 미켈레의 부동산은 발렌티노의 것과 아직 비교도 되지 않는다. 발렌티노는 로마의 빌라, 파리 외곽의 샤토, 뉴욕, 런던, 카프리, 크슈타트에 마련해둔 별장과 요트를 오가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15세기 베네치아 궁전에 있는 한 아파트를 매입한 미켈레는 휴대폰 사진으로 양쪽이 운하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곳을 좋아합니다.” 그가 무기력하게 말했다. “자동차나 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아요. 유일하게 살피는 건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죽었거나 살았던 곳을 좋아합니다.”

25년간 발렌티노에서 일한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지난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직을 내려놓았을 때, 미켈레 임명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가 아카이브 작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발렌티노에는 정말 큰 아카이브가 있으니까요.” CEO 야코포 벤투리니(Jacopo Venturini)가 이렇게 덧붙였다. “발렌티노는 텅 빈 상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유구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브랜드는 아니죠.”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사업 파트너이자 전 연인 지안카를로 지암메티(Giancarlo Giammetti)가 함께 설립한 이 레이블은 로마 역사의 일부였다. 1960년 파리 패션 하우스에 못지않은 오뜨 꾸뛰르 하우스 설립에 착수했던 발렌티노는 공주와 영부인, 그리고 그들처럼 보이길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옷을 입혔다. 10대를 로마에서 보낸 미켈레는 발렌티노가 만든 꾸뛰르보다는 음악,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디자이너의 혁신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발렌티노 자신도 그 지역에서 매우 저명한 인사였다. “그는 교황처럼 친숙한 인물이었죠.” 미켈레가 말했다. “간혹 교황이 자동차를 타고 지나갔고, 발렌티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에서는 권력층을 쉽게 볼 수 있어요. 로마 제국, 인류의 긴 역사와도 맞닿아 있죠. 저는 발렌티노를 교황과 같은 선상에 놓고 싶습니다. 로마는 신과 관련이 있지만 퇴폐미, 번영, 로맨스와도 연관된 곳이니까요.” 미켈레는 현재 92세인 발렌티노를 몇 년 전에야 처음 만났지만, 그가 처음 임명되었을 때 발렌티노가 한참 어린 미켈레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발렌티노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집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유물과 그가 살아온 삶의 단편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요.” 미켈레는 하우스 아카이브에 대해 설명했다. “그것들은 매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당신 앞에서 절대 말하지 않을지도 모를 것들, 그의 섬세한 영혼과 자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해줄 수도 있고요.”

발렌티노의 고객은 기득권층 인사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하우스 자체는 전통적이거나 보수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미켈레가 지적했다. “우리는 발렌티노를 매우 클래식한 인물로 여기지만,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이브 생 로랑처럼 발렌티노는 그의 혁신 덕분에 우아함의 표준으로 여겨졌다. “그들이 문화에서 이룩한 모든 변화를 통해 그들 자체로 문화가 된 거죠.” 미켈레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클래식한 대상으로 그들에게 접근합니다. 푸크시아 컬러 셔츠와 블랙 벨벳 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보면 ‘시크하고 클래식해 보이네. 생 로랑답군’이라고 말하죠. 또는 시크한 러플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보면 ‘그녀는 정말 발렌티노답군’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잊고 있어요. 발렌티노는 1970년대에 게이로 살았습니다. 그 시대 패션계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회 없이 자신의 일을 해냈죠.”

파리에서 미켈레의 컬렉션과 그것을 선보인 무대가 비평가와 팬들로부터 기쁨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미켈레가 맥시멀리즘의 풍요로운 미학과 발렌티노의 유산인 세련된 장인 정신을 결합한 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패션쇼 이틀 후 그곳에서 미켈레를 만났을 때, 그는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다소 비판적인 글을 읽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구찌에서 하던 것을 재현할 뿐이라고 불평했다.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들에게 지독하게 구는 이들이 많아요. 그것이 우리 시대의 흥미로운 모습이죠.” 그가 언급했다. 한 평론가는 미켈레의 장난스러운 액세서리에 대해 혹평을 퍼부었다. “그 비평가는 키튼 백을 든 여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이죠!” 미켈레는 비평가들이 그들 자신의 박탈감에서 동기를 얻는다고 의심했다. “당신이 자유로울수록 사람들은 더 미쳐갑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신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면, 사람들은 ‘왜 당신은 원하는 일을 하는데, 나는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거지?’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롭죠.”

미켈레는 안식년을 보내며 철학 교수인 에마누엘레 코치아(Emanuele Coccia)와 함께 <형태의 삶(La Vita delle Forme)>이라는 책을 완성했다. 그의 파트너이자 도시계획학과 교수 아틸리의 지적 작업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은 창의적인 결과물에 대해 미켈레는 비판적인 시선을 늘 받아왔다. 퇴근길에 미켈레는 가끔 로마의 대학에서 하는 아틸리의 강의를 몰래 들었다. “다음 생에는 평생 공부만 하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아틸리는 그에게 구찌를 떠난 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격려했다. “그는 ‘우리는 우리 삶을 바꿀 수 있고, 당신의 삶도 바꿀 수 있어요. 나는 괜찮아요’라고 말해준 사람이었죠.” 영어로 출간될 자신의 저서에서 미켈레는 지난 몇 년 동안 런웨이에서 탐구한 것의 근간이 된 아이디어에 대해 설명했다. 거기에는 당시 혁신적인 논바이너리 성 정체성과 그 표현에 대한 포용도 포함된다. 그 후 몇 년 만에 이런 제스처는 거의 일상화되었다. 그는 “컬렉션을 만들 때마다, 몸에서 잊힌 정체성을 되살리는 아름다움과 모호함의 이상을 추구했다. 처음부터 직면한 모든 것을 혼합했다. 각각의 방식마다 다양성을 포함하는 방법으로”라고 기록했다.

미켈레는 구찌에서 착수한 탐구 과정을 발렌티노에서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의 지적, 미학적 감성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작업하는 곳의 물리적 유산이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살짝 변화가 있을 것 같긴 해요. 반반 정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영혼은 이어가지만 브랜드를 더 활력 있게 만든다는 뜻이죠. 그렇지만 이 브랜드 주변의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좋아요. 이런 소소한 것이 소중하죠.”

미켈레가 발렌티노의 첫 오뜨 꾸뛰르 컬렉션을 기획하기 시작했을 때, 몇 년 전 구매해 로마 집 다이닝 테이블 뒤에 걸어놓은 그림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파리에 살았고 미켈레가 여러 점을 수집하고 있는 화가 프랑수아 케넬(François Quesnel)의 작품은 허리 부분이 좁고 가슴이 깊이 파인 어두운 색감의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담고 있다. 그녀의 얼굴과 데콜타주(어깨와 가슴 윗부분을 드러내는 네크라인)는 섬세한 흰색 스탠드 칼라로, 목에는 진주 초커를 착용했다. “그녀는 부유한 여성이었죠.” 미켈레는 발렌티노 사무실 근처의 오래된 리스토란테 니노(Ristorante Nino)에서 튀긴 아티초크와 도버산 가자미를 점심으로 먹으며 설명했다.

“사람들은 블랙 드레스가 애도의 표시라고 여기지만, 가장 귀한 컬러였기 때문에 부유함을 나타내는 것이었어요. 이건 모조 검정, 어두운 가지색이죠.” 미켈레를 사로잡은 매력은 컬러뿐 아니라 그림에 표현된 상징성이었다. 그림 속 그녀 뒤쪽 벽에는 그 여인의 젊은 시절 초상화가 걸려 있고, 옆에는 어린 딸이 서 있다. 이는 모성애를 보여준다. 허리 부위에 두른 골드 체인에는 고인이 된 남편의 초상화가 담긴 로켓이 매달려 있다. “그녀는 그로부터 이 큰 왕국을 유산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나는 강력한 여성’이라고 말하는 매우 흥미로운 방법입니다.” 미켈레가 즐겁다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는 꾸뛰르 스튜디오의 책임자에게 그림 사진을 보냈다. “저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여기서 멀어질 수도 있지만, 일단 시작하자’라고 말했죠!”

모델 지아후이 장이 로마의 국립 에트루리아 박물관 앞에 서 있다. 광택이 있는 레드 리본이 고대 두루마리 같은 러플의 투명함, 금빛 자수의 정교함을 상쇄한다.

미켈레는 구찌 재직 시절 무엇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를테면 플로렌스 웰츠가 2016년 그래미 시상식에 입었던 바닥까지 내려오는 핑크색 실크 시폰 드레스를 꼽을 수 있다. 깊이 파인 네크라인의 이 드레스에는 별과 달 장식이 달려 있었다. 플로렌스는 그 드레스에 대해 “아주 편했어요. 느낌이 좋았죠. 알레산드로는 제가 원하는 옷차림에서 아름답고 흥미로운 점을 본 겁니다”라고 회상했다. 미켈레는 발렌티노를 위한 첫 번째 꾸뛰르 컬렉션을 발표하기 전, 11월 파리에서 개최되는 르 발 데 데뷔탕트(LeBal des Débutantes)에 참석하는 기네스 팰트로와 크리스 마틴의 딸 애플 마틴을 위해 하늘색 스트랩리스 실크 플리세 시폰 드레스를 디자인했다. 그는 이 의상을 통해 발렌티노의 기교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꾸뛰르 쇼는 공연 예술가나 그들의 자손을 위한 게 아니다. 그 테이블 뒤에 걸린 초상화 속 부유한 여인의 현대판 여성을 위한 전무후무한 드레스 컬렉션을 선보일 미켈레의 첫 번째 기회였다.

미켈레는 기성복을 만들 때처럼 반사적으로 디자인 복제를 염두에 두지 않으려면 인지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발렌티노 재단사들의 기술적 기량은 거의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그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는 오뜨 꾸뛰르가 ‘실제 생활에 부합하지 않는 드레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경계에 국한하지 않고 원하는 드레스는 어떤 것이든 입을 수 있습니다. 저는 경계가 나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늘 경계선과 싸우고 있어요. 경계선을 파괴하기 위해 물처럼 작은 공간도 관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를 거스르는 사람은 없죠. 자유는 정말 섬세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을 뜻하죠. 당신이 누구인지를 의미하기도 하고요.” 이 과정에는 또 다른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 미켈레 팀은 파리에서 피팅할 때처럼 기성복 컬렉션에서 의상을 제대로 갖춰 입은 모델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꾸뛰르
디자인을 위해 모델은 거의 벌거벗은 채 그 앞에 서 있고, 재단사들이 미켈레가 성스럽다고 묘사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 모델 곁에서 몸에 맞춘 드레스를 완성한다.

“꾸뛰르는 모든 것이 시작된 씨앗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불씨를 계속 살려가는 고고학적 의식이죠.” 미켈레가 말했다. “그 의식을 이어가기 위해 저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재단사들과 그 드레스를 볼 때, 우리가 지켜야 하는 영혼, 매우 강하고 강력한 정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종교적으로 느껴지죠. 재봉사들은 발렌티노 본사에서 조금 떨어진 유적지인 베스타 여신의 신전에서 신성한 불꽃을 관리하는 고대 로마의 여사제들처럼 그 불 관리법을 알고 있어요.” 이 비유는 수천 년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우리의 삶과 개인이라는 존재의 덧없음을 미켈레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더 단조롭게는, 패션의 덧없는 속성을 상기시켰다. 미켈레는 그 문화를 발렌티노에서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들은 불꽃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 하며, 저는 불꽃을 관리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저는 그저 그중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불꽃을 계속 살리는 건 여러분의 몫이죠.” (VK)

    에디터
    김다혜
    Rebecca Mead
    사진
    Annie Leibovitz
    모델
    Ali Dansky, Jiahui Zhang, Luiza Perote
    스타일리스트
    Tabitha Simmons
    헤어
    Shiori Takahashi
    메이크업
    Yadim
    네일
    Silvia Magliocco
    테일러
    Viola Sangiorgio
    프로덕션
    AL Studio, Kitten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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