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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를 충전해드립니다, ‘폭싹 속았수다’

2025.03.20

인류애를 충전해드립니다,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화제작 <폭싹 속았수다>는 감동 가족 드라마다. 동시에 여성 3대를 통해 20세기 한국을 다시 그리는 장엄한 시대극이자, 배역의 중요도를 불문하고 한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는 연기 장인들과 섬세한 지휘자가 만나서 빚어낸 웅장한 오케스트라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 삶과 죽음, 사랑, 인연, 재생산의 의미를 사색하고 언어의 아름다움에 천착하는 문학적인 면도, 600억 제작비가 무색하지 않은 회화적 영상미도 갖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폭싹 속았수다>를 연출한 김원석 감독은 <성균관 스캔들>과 <시그널> 등을 히트시킨 바 있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중 이번 작품과 가장 가까운 것은 <미생>과 <나의 아저씨>다. 허름한 일상에 풍부한 뉘앙스를 담아내고, 리얼리티가 가시지 않은 신선한 얼굴을 대거 기용해 믿음직한 앙상블을 만들어내고, 스릴과 서정을 절묘하게 배합하고, 끝내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남긴 작품들이다. 극본은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 무렵>의 임상춘 작가가 썼다. 몰라보게 스케일이 확장되긴 했지만 전작들의 애틋한 정서, 우직한 사랑꾼 캐릭터, 소시민에 대한 애정, 가족주의 등이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이어진다.

이야기는 광례(염혜란)와 어린 애순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광례는 제주 해녀다. 목숨 건 육체노동으로 가정을 건사하는 해녀는 온 나라가 지독하게 가난했던 전후 한국 여성들의 처지, 강인한 생활력, 희생을 대변하는 존재다. 같은 맥락으로, 광례의 첫 남편이자 애순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부재한 것, 둘째 남편이 광례에게 기생하는 놈팡이인 것도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던 당시 상황에 대입할 수 있다. 이 상징적인 여성은 똑똑하고 욕심 많은 딸 애순에게 헌신한다. 남의 집에 보낸 애순이 더부살이 설움을 겪자 끼니가 걱정될 판이어도 아이를 되찾아오고, 애순이 가난 때문에 학교에서 불이익을 겪자 아껴둔 양장을 꺼내 입고 선생을 찾아가 쌈짓돈을 건넨다. 그는 자식 하나 건사하자고 죽을 때까지 물질을 멈추지 않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광례는 극 초반에 퇴장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딸 애순, 손녀 금영에게로 이어진다. 염혜란은 숨 막히게 강렬한 연기로 작품 내내 짙은 아우라를 남기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조연들의 연기 열전이 더해져 그 시절 여성들의 신산함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제주어 원어민에게는 걸리는 부분이 많겠으나 ‘육지것’들은 자주 오열하게 된다.

작품의 ‘여름’에, 청년기에 접어든 애순(아이유)은 관식(박보검)과 뜨거운 연애를 하고, 성별과 가난 때문에 꿈이 꺾이고, 어머니로서 씻지 못할 상처도 얻는다. 무쇠 같은 성품의 순정남 관식은 애처롭고, 일하다 다쳐도 말 한마디 못하는 그를 대신해 고용주와 싸우는 애순은 든든하다. 그들은 지독하게 가난하지만 이웃, 친척, 어머니의 동료들, 어쩌다 스친 인연의 도움으로 세상에 자리를 잡아간다. 온 마을이 힘을 모아 그들을 부모로 길러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작품이 ‘가을’에 접어들면 애순 역 배우는 아이유에서 문소리로 바뀐다. 아이유는 이제 애순의 맏딸 금영을 연기한다. 중년의 애순은 평온하다. 사리에 맞지 않으면 선생에게도 바락바락 악을 쓰던 학창 시절, 금영을 해녀로 만들자는 시어머니 앞에서 밥상을 뒤엎던 초보 엄마, 내 딸은 여자라고 못하는 거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하겠다며 어촌 계장 선거에 출마하던 혈기왕성한 모습은 사라졌다. 금영은 애순의 그 세월을 모른다. 그래서 엄마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장담한다. 애순은 웃는다. 금영은 자기가 과거 애순과 얼마나 닮았는지 모른다. 자신과 닮은 딸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사는 게,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게, 애순은 좋다. 금영이 대학 합격증을 받자 관식은 애순에게 “이건 당신이 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이유를 1인 2역으로 쓴 건 가족 재생산의 의미를 강조하는 재미있는 장치다.

부모와 자식은 다른 계절을 산다. 제주를 벗어나 서울로 진학한 금영은 홀로 넓은 세계와 부딪치며 자신의 여름을 시작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스틸 컷. 유은미/넷플릭스 ©2025

예고편에 따르면 남은 이야기는 금영이 중심이 될 듯하다. 어린 애순을 연기할 때 아이유는 작품의 핍진함에 비해 가벼워 보일 때가 있다. 이 캐릭터 자체가 꿈 많은 문학소녀이고, 설익고, 새침한 구석이 있다. 그의 새침함은 현실에 부대끼고 성장하면서도 일부 남아서, 성인 애순을 연기하는 문소리가 그 연기 톤을 이어받는다. 금영의 대학 시절을 연기하는 아이유는 다르다. 다 같이 가난하고 못 배운 시절을 산 애순에 비해 금영은 상대적 박탈감이 강하고, 학벌과 비례해 자존심은 높고, 가족의 기대도, 삶의 비교 대상도 애순의 그것과는 다르다. 1980년대 서울의 인심은 가혹하다. 돈 때문에 자존심이 꺾이는 경험을 거듭하면서 그의 정신에 허기가 쌓인다. 그래서 금영은 젊은 날의 애순보다 어둡고 예민하다. 아이유의 진가는 금영을 연기할 때 드러난다. 그 때문에 남은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폭싹 속았수다>는 인생의 찬란함과 쓸쓸함을 모두 담아낸 작품이다. 아기자기한 소동극, 왁자한 농담, 고난과 치욕, 희망과 성취, 애끓는 비애가 교차한다. 가족주의와 휴머니즘은 이 드라마의 양대 기둥이다. 광례, 애순, 금영으로 이어지는, 자식을 통해 삶을 재생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진 지금 시대에는 무너진 환상을 담고 있다. 부모의 덕도 악도 자식에게 돌아간다는 반복되는 메시지는 착한 미신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에는 헌신의 가치, 사랑의 힘, 인간의 이타심, 인생이 발전한다는 약속, 선량하고 정도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보상이 따른다는 가설 따위를 믿게 된다. 그 시절을 살아낸 이들과 제작진 모두에게 제목이 뜻하는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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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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