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의 두 얼굴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위한 필수품이 폐 손상을 앞당기는 주범이라면 믿겠나?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하얀 연기에 감춰진 가습기의 불편한 진실.
별일 아닌데 저마다 묘한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내 경우 안방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에어 워셔 ‘벤타’의 뚜껑을 열어 빈 통을 확인할 때가 그렇다. 잠들기 전 가득 채워 넣은 2L의 수돗물이 밤새 증발했다는 건 사막처럼 건조한 실내 공기가 그만큼 촉촉해졌다는 방증. 왠지 모르게 상쾌해진 기분은 그야말로 보너스다. 가습기는 한때 겨울 특수 상품이었다. 그러나 공기 청정 기능을 결합한 멀티 제품이 쏟아지면서 사계절 내내 사랑받는 시즌리스 가전이 됐다. 의사들이 권하는 실내 적정 습도는 40~50%. 하지만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초봄까진 실내 공기가 건조해 습도는 10~20%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습도는 우리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코나 기관지 등 호흡기 점막이 건조해지면 점막 세포의 정상적 방어기전이 손상되기 쉽죠. 이렇게 손상된 점막을 통해 바이러스나 세균 감염이 일어나고 호흡기 질환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무엇보다 건조한 환경은 안구 건조증을 일으키거나 기존의 피부 질환을 악화시켜요.” 고려대학교 안산병원 가정의학과 남가은 교수의 설명이다. 적절한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미세먼지 제거를 위해서도 가습기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미세먼지는 대부분 오염 물질에 의해 발생한 분진으로 양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음이온을 방출하는 가습기는 공기 중의 미세먼지를 제거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침묵의 살인자’란 타이틀로 잘못된 가습기 사용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 사건이 보도됐다. 미세먼지와 더불어 2016년 가장 시급한 환경문제로 떠오른 가습기, 대체 뭐가 문제일까?
오랫동안 고인 연못은 썩기 마련이듯 가습기 역시 마찬가지.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문제는 가습기가 아닌 가습기 전용 ‘살균제’에 있다. 1994년 11월, 국내 최초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 메이트’를 소개한 <한겨레신문>은 “가습기는 이틀만 물을 갈지 않아도 세균이 번식해 우리 건강에 해를 끼칠 수 있다”며 가습기 전용 살균제를 반겼다.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염화올리고에톡시에틸 구아니딘, 클로로메틸 이소치아졸리논. 발음조차 어려운 이들의 정체는 가습기 살균제를 이루는 핵심 물질이다. 의외로 피부에 바르거나 입으로 섭취할 때 독성이 적고(다른 살균제에 비해 5분의 1에서 10분의 1 수준) 물에 잘 녹는 성질 때문에 알고 보면 주방 세제, 콘택트렌즈 세척액, 샴푸, 물티슈 등에 두루 사용됐다. “살균과 부패 방지 효과가 뛰어난 화학물질입니다. 원래 의료용 물질로 개발되었지만 곰팡이와 세균에 뛰어난 효과를 보이며 살균 성분으로 더욱 각광받았죠.” 하지만 이와 같은 성분이 호흡기로 흡입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습기 살균제가 공산품으로 분류돼 공산품안전관리법에 따른 일반적인 안전기준이 적용된 게 화근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가습기 살균제를 이루는 유해 물질이 호흡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흡입되면 독성이 발휘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불행 중 다행인 건 현재 한국의 모든 가습기 살균제 유통이 중단된 상황이라는 것.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으로 가습기 사용에 대한 불신은 커졌지만 이럴 때일수록 꼼꼼히 살피고 관리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세균이나 곰팡이는 고인 물에서 쉽게 번식한다. “가습기에 남아 있는 물을 이틀만 방치해도 세균은 엄청나게 늘어나요. 한마디로 세균 분무기 로 돌변하죠.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이 일반 가정에서 쓰는 가습기를 조사한 결과 녹농균이나 포도상구균 등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검출됐습니다.” 차움 안티에이징 센터 김종석 교수의 말처럼 가습기로 인한 병원체(감염증을 일으키는 기생생물)의 번식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가습기 청결 관리에 문제가 있을 때 발생한다. 요즘 대형 병원에선 병실에 틀어놓는 가습기를 없애는 추세. 따라서 상투적인 조언 같지만, 가습기 통의 물을 매일 교체하고 깨끗이 세척하는 철저한 관리만이 해답.
가습기 청결의 중요성을 인지했다면 실천만 남았다. 거창한 준비물은 없다. 부엌에 있는 베이킹 소다, 식초, 소금 중 하나를 골라 뜨거운 물과 섞어 가습기 내부를 씻고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충분히 헹군 다음 햇빛에 말리면 끝. 가습기에 채워 넣는 물은 정수기나 미네랄워터보다는 수돗물을 쓰고 여유가 된다면 한 번 끓였다 식힌 물을 권한다. 가습기가 뿜는 하얀 증기가 피부 보습에 도움을 준다는 말에 혹해 얼굴과 맞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올려두곤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욘 없다. 땅바닥에서 0.5~1m 정도 높이로, 우리 몸에선 최소 1~2m 거리에 비치해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밤사이 가습기를 계속 틀어 놓는 것보다 잠들기 3시간 전에 틀었다 끄고 잠드는 게 현명하다. “한정된 공간에 장기간 습기가 머무르면 그만큼 세균 번식이 심해지니까요.”
가습기 사용만큼 중요한 게 또 있다. 바로 환기. 하루에 두세 차례 10분 정도 문을 열어 공기를 순환시키면 실내 습도를 쾌적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문가들은 “가습기 청결에 힘쓸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젖은 수건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잠들라”고 말한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 그게 사람이건 사물이건.
- 에디터
- 이주현
- 포토그래퍼
- HWANG IN WOO
- 도움말
- 남가은(고려대학교 안산병원 가정의학과), 김종석(차움 안티에이징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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