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가 되어버린 전공의생활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언슬전>)이 첫 주 본방 시청률 4%대,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 TV 부문 10위를 기록했다. 시즌 2까지 제작된 <슬기로운 의사생활>(<슬의생>)의 스핀오프라는 것을 감안하면 조촐한 오프닝이다.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다만 작금의 의료계 현실이 드라마와 일치하지 않아서 감상이 복잡해진다.

<언슬전>은 지난해에 공개하려다가 전공의 파업 때문에 이연된 작품이다. 과연 멋 부리기 좋아하는 평범한 20대 여성이 의료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 <언슬전>이 동원한 패션 아이템은 약간 철이 지났다. 올 초 화제가 된 <중증외상센터>가 정부, 병원, 의사들을 두루 비판하면서 현실 분노를 주인공에 대한 애정으로 치환한 반면, <언슬전>은 꼼짝없이 논란의 당사자들 중 한쪽에 서 있다.
<언슬전>은 수면과 식사를 해결할 시간도 없이 격무에 시달리면서 사방에서 구박을 받는 바이탈과 전공의들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다룬다. 언제 포기해도 이상할 것 없는 그들이 병원에 남게 되는 이유로 자주 거론되는 게 동기들 간의 의리와 월급이다. 과연 제작진은 <슬의생>의 ‘99즈’를 대체할 젠지 동기 그룹의 캐릭터를 각인시키는 데 공을 들인다.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의생> 시리즈에서 제법 잘 먹힌, 매력 넘치는 복수의 남주인공에 둘러싸인 여주인공의 남편 찾기라는 설정은 제거했다. 그래서 이들의 고난과 성장이라는 메시지에 더 집중력이 생겼다.


주인공 오이영(고윤정)은 1회 100만원짜리 피부 관리를 다달이 받던 금수저로, 아버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취직했다. 그는 주변에 관심이 없다. 일에도 의욕이 없다. 고등학교 때 전교 1~2등을 다투던 동창 이름도 못 외우고, 교수들이 선심 써서 실습 기회를 준대도 “괜찮습니다” 하고 말아서 미움을 산다. 그는 호시탐탐 도망칠 기회를 노리지만 그때마다 응급 상황이 발생해서 발길을 돌린다.
긴 머리에 시크릿 투톤 염색을 하고,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폰 케이스를 쓰고,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친구의 명품 가방과 화려한 결혼을 질투하던 표남경(신시아)은 단 2화만에 다른 사람이 된다. 과로로 초췌해지고 넋이 나간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한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응급 쇼핑에 실패하고 병원으로 돌아간다. 차분한 휴먼 드라마에 간결한 시추에이션 코미디를 병렬시켜 변칙적인 호흡을 만들어내는 건 이 제작진의 장기인데, 2화 표남경의 에피소드에서 그 매력이 잘 드러난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오이영과 주변에 과시할 타이틀을 좇던 표남경이 의사의 본분에 눈을 뜨는 사이, 이미 자기 일에 의욕이 넘치던 김사비(한예지)와 엄재일(강유석)은 다른 전기를 맞는다. 김사비는 발군의 학습 능력을 가졌지만 대인 관계 이해력이 부족하다. 그의 AI 같은 모습은 시청자에게는 웃음을, 극 중 환자들에게는 짜증을 유발한다. 엄재일은 관심에 목마른 인물로, 매사 의욕이 넘치지만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업무에서 배제되어 소외감을 느낀 재일은 병원을 탈출하지만 아무도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 속 갈등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해결책이 있다.
1~2화에서 주인공들은 사명감, 동기애, 월급 말고 병원 잔류의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낸다. 각자의 멘토를 발견한 것이다. 마녀라는 별명과 달리 상벌이 정확한 교수 서정민(이봉련), 늘 웃는 낯이지만 전공의들이 사고를 치거나 위기에 빠지면 가장 먼저 달려와 해결해주는 구도원(정준원), 엄재일의 질문 공세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지만 그의 성장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레지던트 2년 차 차다혜(홍나현) 등이다. 늘 해답이 있고 조력자가 있어서, 이 드라마의 직장 풍경은 감동적인 판타지다. 그 과정에서 이봉련 배우의 개성이 제대로 쓰임새를 찾은 게 반갑다. 그의 한국 드라마 주인공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외모, 날카로운 딕션, 유연한 연기가 캐릭터의 전문성에 신뢰를 더한다. 그 덕에 이 판타지가 덜 작위적으로 보인다.



<언슬전>은 재력, 두뇌, 성격, 명망 다 갖춘 의사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슬의생>에 비해 느끼함이 덜하다. 물론 이 작품도 의대 입시와 졸업을 마친 한국 최상위 엘리트들의 ‘그들만의 리그’를 아련, 애틋하게 그리기는 한다. 하지만 이번 주인공들은 아직 리그 말단에서 치이는 존재들이다. 일반 시청자가 공감할 여지가 있다. 신원호, 이우정 사단 특유의 휴머니즘과 유머는 그것대로 잘 작동한다.

요컨대 <언슬전>은 이 시리즈에 팬들이 기대한 것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드라마다. 메디컬 드라마의 긴박함, 성장 드라마의 감동도 잘 살렸다. 하지만 드라마 밖의 상황이 문제다. 최근 정부가 의대 증원을 취소했지만 전공의들은 아직 복귀하지 않았다. <언슬전>은 이런 사태를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은 병원에서 뛰어다니는 전공의 자체가 판타지다. 극 중 종로율제병원 산부인과 에이스인 서정민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좋은 걸, 도대체 왜 안 하고 싶냐고!” 집 나간 전공의들은 이 대사가 반갑지 않을 것이다. 의료 분쟁의 직격탄을 맞은 환자들은 그들대로 드라마 속 의사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재미있지만 공허하다. 이 드라마가 제대로 평가받을 ‘언젠가’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
*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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