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은 그의 인생이다.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호크니가 예술을 통해 얼마나 투명하게 자신을 드러냈는지 다시 보여준다.

“지난 월요일에 영국 국왕이 여기 오셨어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런던에 있는 자택 겸 작업실에서 줌으로 영상통화를 하며 내게 말했다. “1시간 정도 얘길 나눴죠. 그런데 다음 날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시면서 제 작업실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에민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87세의 예술가는 늘 그렇듯 한결같았다. 조용한 듯하면서도 쾌활하고, 여전히 스타일리시했다.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동그랗고 커다란 검은색 뿔테 안경만 노란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백발은 숱이 조금 줄어든 듯 느껴졌고, 터키 블루 스웨터에 흑백 체크무늬 타이, 칸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재단사가 직접 만들어준 패턴 수트 아홉 벌 중 한 벌을 입고 있었다. 그가 그림 그릴 때마다 입는, 최근 그린 자화상에도 등장하는 바로 그 수트였다.
호크니는 잡동사니로 가득한 거실 테이블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천장부터 바닥까지 늘어뜨린 빨간 벨벳 커튼이 눈에 띄었다. 그가 파트너 장 피에르 곤살베스 드 리마(Jean-Pierre Gonçalves de Lima)와 함께 키우는 닥스훈트 테스(Tess)가 집 안 어디선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그의 재킷 깃에 달린 버튼에 대해 물었다. 버튼에는 “End Bossiness Soon(우두머리 행세는 이제 그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End Bossiness Now(우두머리 행세는 당장 멈춰)’로 쓰려고 했는데 권위적인 것 같아서 순화했어요. 요즘 세상에는 우두머리 행세를 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전보다 훨씬 심하죠.” 저항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마친 호크니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얼핏 보이는 재킷 안감에는 담배 그림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혹시 시가도 태우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뭐든 다 피워요.” 그런 뒤 덧붙였다. “살 만큼 살았어요. 70년간 직업 화가로 살았고요. 지금은 인생 최대의 전시를 앞두고 있죠.”

그가 언급한 전시는 4월 9일부터 8월 31일까지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리는 호크니의 개인전 <David Hockney 25>다. 무려 400점에 달하는 유화, 드로잉, 판화, 무대 디자인 작품이 불로뉴 숲에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전시장 전체를 도배한다. “그곳 전시 중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하더군요.”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게리에게 전화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저도 얼른 직접 보고 싶어요. 호크니는 절대로 작품을 그냥 단순히 벽에 걸기만 하지 않거든요. 건물 전체를 완전히 장악해요. 그렇게 할 배짱이 있으니까요.”
“데이비드는 이번 전시를 자신의 예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로 여기고 있어요.” 전시를 큐레이팅한 미술사학자 노먼 로젠탈(Norman Rosenthal)이 증언했다. “아주 좋은 의미에서 더없이 평범해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작업을 하죠. 또한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말을 겁니다. 자기만의 세계관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가는 극히 드물어요.” 이번 프로젝트는 LVMH 그룹 회장이자 CEO 베르나르 아르노에게도 의미가 깊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커리어 초반부터 그의 작품을 좋아해온 사람으로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이 이런 기념비적 전시를 열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규모 면에서도 주목할 만하지만, 전시의 모든 측면에 호크니가 직접 개입해 그의 창조적 세계관에 대한 독보적인 통찰을 전달하는 전시입니다. 지난 4분의 3세기 동안 그의 예술이 걸어온 놀라운 발자취를 강렬한 시각언어로 보여줄 것입니다.”
학자이자 루브르 박물관의 컨템퍼러리 예술 프로그램 책임자인 도나티앵 그라우(Donatien Grau)는 템스 앤 허드슨에서 출판한 전시 도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데이비드는 드가나 피카소에 준하는 기량을 갖춘 현존하는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다.” 호크니는 그라우의 초상화를 두 번이나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면 무엇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지가 투명하게 보여요. 그중 색깔이 가장 도드라지죠.” 그라우는 회상한다. “그는 제가 입었던 재킷의 남색을 더 뚜렷하게 표현했고, 바지의 검은색은 한층 진하게 그렸어요. 스카프의 물방울무늬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담았고, 당시 제가 앉아 있던 라탄 의자의 버들가지가 하나하나 다 보일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했죠.”

호크니의 켄싱턴 작업실에는 유명한 의자가 하나 있다. 아담하면서 독특한 패턴의 패브릭을 덧씌운 팔걸이의자로, 런던에서 그린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그 의자를 자세히 기억한다. 호크니는 런던, 로스앤젤레스, 파리, 요크셔, 노르망디 등 세계 여러 곳에 머물며 작업해왔지만, 지난 몇 년간은 다시 런던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다. 건강이 썩 좋지는 않지만 정신만큼은 전에 없이 또렷하고, 요즘도 매일 작업실에서 새 작품을 그린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면서 말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땐 오랜 친구를 만나거나 전시(최근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는 두 번이나 보고 왔다)와 발레, 오페라를 보러 간다. 독서에도 열심이다. 새로 나온 예술서나 전시 도록도 찾아 읽고, 특히 전기 읽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캐서린 버크넬이 쓴 크리스토퍼 아이셔우드 작가의 전기를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했다.
파리 전시에서는 호크니의 신작 대부분이 공개된다. 뭉크와 윌리엄 블레이크에게 영감을 받아 작업한 두 점의 대형 회화 작품, 새 자화상(그는 지금껏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리고 24시간 내내 그의 곁을 지키는 두 간호사 중 한 명을 그린 초상화를 아우른다. 호크니는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컨디션이 좋은 날엔 최대 2시간까지 쉬지 않고 그린다. 그의 환상적인 팀(장 피에르, 간호사 루이스와 소니아, 호크니의 명작 ‘Mr and Mrs Clark and Percy’를 통해 영생을 얻은 오시 클라크와 셀리아 버트웰의 아들로 매주 호크니를 위해 요리를 해주는 셰프 앨버트 클라크, 기술 비서 조나단)은 전부 호크니와 마찬가지로 “우두머리 행세는 이제 그만”이라 새겨진 버튼을 깃에 달고 있다. 여기저기 적어둘 뿐 아니라 매일 사명처럼 지켜내는 호크니의 좌우명은 “삶을 사랑하라”이다. 우리의 대화에서 그는 어제부터 그리기 시작한 새로운 초상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오랜 친구로 미술사학자인 마르코 리빙스턴(Marco Livingstone)의 초상화라고 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예술가에게 공통적으로 던지는 질문을 그에게도 건넸다. 피카소와 브라크 혹은 라우센버그와 존스처럼 스스로를 더 분발하게 하고, 그와 빗대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예술가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늘 피카소를 본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죠.” 그가 느릿느릿 답변했다. “피카소는 정말 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의 작품을 분류한 목록만 책 34권 분량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데이비드 호크니는 1937년 영국 요크셔의 산업도시 브래드퍼드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회계사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고,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호크니는 열한 살 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예술가’라는 말의 의미가 무척 모호하게 느껴졌다.” 자서전 <David Hockney by David Hockney: My Early Years>에 실린 그의 회상이다. 왕립예술대학 재학 시절, 호크니는 진갈색 머리를 금발로 탈색하고, 국민건강보험의 혜택으로 지원받던 안경 대신 동그랗고 검은 뿔테 안경을 착용한 뒤, 패턴이 돋보이는 화려한 색상의 수트를 입고 다녔다. 그 자체로 작품이 되어, 한 번도 그의 그림을 본 적 없는 사람에게도 호크니는 유명했다.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죠.” 전도유망한 신인 예술가를 찾아다니다 1963년에 호크니의 첫 전시를 기획한 아트 딜러 존 카스민(John Kasmin)의 말이다. 카스민은 호크니가 왕립예술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그의 작품을 보고 현재 함부르크 쿤스트할레에 소장 중인 ‘Doll Boy’를 40파운드에 구입했다. “앤디 워홀과 마찬가지로 유명인 그 이상의 존재예요.” 카스민이 덧붙였다. “런던에서 아무 택시나 잡아타도 기사들이 그를 알아봤어요. 데이비드는 유럽에서도 한동안 옷을 가장 잘 입는 남자로 꼽혔죠. 제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노란 크록스 신발을 신은 채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드나들 수 있습니다.”
1963년 카스민이 자신의 갤러리를 열었을 때 호크니는 그의 갤러리에 소속된 유일한 구상화가였다. “데이비드는 제 갤러리에서 늘 혼자 겉도는 존재였죠.” 카스민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카스민은 호크니의 작품을 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왕립예술대학을 졸업할 때쯤, 나는 꽤 부유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자서전에 기술했듯 호크니는 1963년에 혼자 뉴욕에서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고, 이듬해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며 수영장에서 수영하거나 샤워하는 젊은 남자들이 등장하는 여러 작품을 선보이며 영향력 있는 주류 예술가로 거듭났다. 호크니는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 영국을 떠나 화창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유화물감보다는 아크릴물감을 쓰기 시작했다고 화가 존 커린(John Currin)은 설명했다. “유화는 피부 같아요. 만지고, 눌러볼 수 있죠. 유화는 만지는 거예요. 반면 아크릴은 보는 거죠. 반은 보이고, 반은 보이지 않는, 물에 비친 태양 같다고 할까요.”
호크니는 크리스토퍼 아이셔우드와 돈 바차디를 그린 그림처럼 아주 매력적인 2인 초상화도 여럿 그렸다(호크니는 언젠가 “사람의 얼굴은 우리가 보는 것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왕립예술대학 재학 시절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오클라호마에서 온 또 다른 이주자, 팝 아티스트 에드 루샤(Ed Ruscha)만큼 로스앤젤레스의 인상과 분위기를 명징하게 정의했다. “데이비드는 대중문화에 레이더를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저도 그랬어요.” 루샤의 발언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접근 방식에서는 저와 완전히 달랐죠. 호크니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선을 잡아 끌고 이미지를 만드는 대단한 예술가예요. 영감을 찾아 로스앤젤레스 곳곳을 헤맸고, 그걸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작품에 구현했죠.”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호크니의 예술은 늘 변화해왔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난봉꾼의 행각>, <마술피리>, <퍼레이드> 등의 오페라와 연극을 위한 무대 디자인과 코스튬 디자인에 몰두했고, 그림과의 결합을 위한 도구로 사진을 적극 활용했다. 1980년대 말에는 작품 규모가 훨씬 커졌고, 더 과감하고 눈에 띄는 색채를 활용해 한층 대담한 그림을 그렸다. 커다란 파노라마 풍경 작품도 자주 그렸다. 강렬한 붉은빛으로 점철된 ‘A Bigger Grand Canyon’(1998)이 백미로, 캔버스 총 60개를 이어 붙였으며 너비가 7.6m에 이르는 큰 규모다.
호크니는 풍경, 초상화, 꽃이 등장하는 정물화를 계속 그렸지만 늘 새로운 방식을 갈망했다. 2010년부터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수천 장의 회화와 드로잉을 그려왔다. “호기심 많고, 그림을 통해 세상의 시각적 측면을 탐구하는 그는 새로운 무언가와 맞닿는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드로잉에 접근하는 듯 보입니다.” 화가 사이 개빈(Cy Gavin)은 설명한다. “다른 이들이 풀밭을 볼 때 호크니는 그 잔디밭을 구성하는 민들레, 클로버, 사초, 명이나물, 바이올렛 등을 찬찬히 들여다봐요. 살아 있다는 것과 실제 삶을 살아가는 건 다른 이야기이듯 시력이 좋다고 누구나 제대로 보는 건 아니죠.” 2023년에 호크니는 4층 규모의 런던 예술 공간 라이트룸의 개관전을 스케치북 작업, 무대 디자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위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담긴 영상으로 가득 채웠다.
호크니는 출신과 세대에 관계없이 많은 예술가에게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닌다. “회화나 드로잉을 단순화할 때 데이비드 호크니의 시각적 명료성을 떠올립니다.” 영국 화가 셀리아 폴(Celia Paul)은 이야기했다. “홀바인(Holbein)만큼 호크니를 존경해요. 두 사람 모두 지나친 기교 없이 본질적 진실을 담아내죠.” 또 다른 예술가 엘리자베스 페이튼(Elizabeth Peyton)은 호크니에 대한 1974년 영화 <비거 스플래쉬>를 보고 “새롭게 눈뜨게 됐다”고 표현했다. “호크니 같은 예술가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을 수 없죠.” 페이튼이 말을 이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해 그가 보여준 끈질긴 해석은 정말 놀라워요. 급박한 세상의 흐름에서도 온전하고 완전한 의미를 포착하고, 사람과 풍경, 빛의 다양성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해내는 데 탁월하죠. 모네가 그린 건초 더미 그림처럼, 당대에 호크니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보는 법’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과연 데이비드 호크니는 천재적 관찰자다.
꿈같은 대화 속을 정처 없이 거닐다 보니 시간은 저녁 7시 30분이었고, 호크니의 정원에서 1년 내내 그대로 두는 듯한 크리스마스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호크니가 난데없이 이렇게 말했다. “참 어처구니없는 세상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덧붙였다. “그런데 보아하니 점점 더 어처구니없어지는 것 같아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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