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원작 소설과 영화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이란 으레 그렇다.’ 이 문장과 함께 소개되는 소설의 첫 장은 60대 여성 킬러가 타깃을 처리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소설의 시선은 ‘살인’보다 ‘풍경’을 훑는다. 지하철에 탄 승객의 옷차림과 표정, 냄새를 포착하는 문장이 장황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다. 그런 가운데 ‘노년의 정석에 가까워 모자라지도 튀지도 않은 옷차림을 갖춘’ 한 노인 여성이 성경책을 꺼내 읽다가 지하철에서 내리고 한 남자가 쓰러지는 상황까지 ‘으레 그런 것처럼’ 슬쩍 끼워 넣는 것이다. 그처럼 소설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라는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주인공인 이야기인데도 ‘으레 그런’ 풍경의 밀도가 더 중요한 이야기다.


주인공 조각은 킬러지만, 노인들이 으레 그렇듯 노화를 체감하는 중이다. 또 으레 그렇듯 가는 곳마다 ‘어머님’이란 호칭으로 불린다. 또 세상이 으레 그렇듯 그녀는 조직으로부터 퇴물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세상이 자신을 노인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노인이 되지 않는다. <파과>는 아직 노인으로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인간이 자신을 노인 취급하는 세상에서 겪는 내적 갈등을 ‘킬러’라는 직업을 통해 장르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60대 여성 킬러’라는 캐릭터를 그리면서도 ’60대’에 방점을 찍었다고 할까. 하지만 민규동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이혜영이 주연을 맡은 영화 <파과>는 원작과 다른 비전을 펼친다. 영화가 무게를 두는 부분은 60대라는 나이가 아니라 ‘킬러’라는 직업이다.
65세에도 ‘대모님’으로 불리는 그녀는 어떻게 킬러가 되었나. 영화는 이 사연을 먼저 드러낸다. 당연히 으레 그렇다고 볼 수 없는 사연이다. 이때부터 관객들이 보게 되는 건, 노인 여성이 아니라 아직도 건재한 여성 킬러의 생활이다. 매일 아침 동네 뒷산을 뛰며 운동하고 사무실을 찾아가 다음 프로젝트를 살펴보고 일을 처리한 후에 보고서를 쓰는 게 그녀의 루틴이었다. 그런데 이 루틴이 노화 때문에 무너진다. 예전에는 쉬웠던 일이 힘들어지고, 그래서 크게 다치는 일도 생기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상황도 벌어진다. 이때 한 남자가 그녀를 치료한다.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그가 누구든 처리하는 게 원칙이었던 여자는 그 사람을 예외로 한다. 그 사람의 모습이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으레 그런 세상과 주인공을 대비시키려고 애쓴 원작과 달리 영화 <파과>는 극적인 사연과 감정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래서 자신을 치료해준 남자에게 갖는 감정 또한 원작에서 묘사된 것과 다르다. 원작에서 그녀의 감정은 혼자 몰래 간직하려는 욕망, 또는 노년에 갑자기 찾아온 설렘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과거에 경험한 상실에 의한 작용이고 명확한 사랑이다. 상업 영화로서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연출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비전은 매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그래서 원작 팬이라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생겨난다. 원작이 보여준 ‘늙음’은 단순히 몸의 노화가 아니다. 소설은 나이가 들면서 달라지는 감성의 변화까지 포착했고, 이 때문에 그녀가 일을 그르치는 과정까지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타깃을 미행하던 원작의 그녀는 거리에서 폐지를 옮기던 노인이 난처한 일을 겪자,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도와주다가 타깃을 놓치고 얼굴까지 노출한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 연민에 당혹스러워한다. 흔히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되는 노인의 연민과 측은지심을 소설은 그 또한 늙음이 가져온 낯선 감정으로 보여준 것이다. 영화는 이 대목을 주인공이 버려진 강아지를 구조하는 상황으로 요약했다. 강아지와의 만남은 물론 원작에서 설정된 부분이지만, 영화는 아무래도 더 드라마틱한 설정으로 이 만남을 활용한다. 영화 <존 윅>에서 본, 존 윅과 아메리칸 불리의 만남이 연상된다고 할까.

영화 <파과>는 그처럼 상업 영화로서의 비전을 밀어붙인 작품이다. 원작 팬으로서는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물보다는 이렇게 명확한 비전을 구현한 각색이 더 나아 보일 수도. 하지만 흔치 않은 여성 서사로서, 그보다 더 희귀한 노인 여성의 액션 장르 영화로서 볼 때 ‘늙음’에 대한 무게를 조금 더 짊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드 보일드 장르 영화다운 거친 액션 신이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화 속 그녀는 원래 잘 싸웠고 지금도 잘 싸우는 사람이다. 현저히 떨어진 순발력과 근력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역으로 이용하는 등의 액션을 구현했다면 이 영화만의 색깔이 강한 액션 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다. 아쉬움이 크기 때문인지 으레 그런 영화 중 한 편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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