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시가 할 수 있는 일

2025.04.30

시가 할 수 있는 일

백가경 시인이 쌓아 올린 노동과 유희의 언어.

2022년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백가경 시인의 첫 시집 <하이퍼큐비클>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의 말에 의하면 ‘큐비클’은 개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파티션으로 분리된 사무 공간을 말한다. 여기에 ‘과도한’, ‘초월한’이라는 뜻을 지닌 ‘하이퍼’라는 단어를 조합해 수천, 수억 개의 큐비클이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 건축물로, 시공간을 초월한 형태로 빚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은 존재하지만 특정할 수 없는 기후 위기, 인종차별, 자본에 소외된 비인간 동물의 처지, 혐오로 점철된 사회 등을 가시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건축가의 태도로 설계하고 쌓아 올린 백가경 시인의 언어는 노동의 흔적인 동시에 유희의 결과물이다. 우리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크고 작은 고통과 책무와 비극을 예민하게 들여다보는 시인은 언어라는 놀잇감을 활용해 폭발력 있는 유희의 장을 만들어낸다.

하이퍼큐비클 속 노동자에 대한 묘사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과로 상태다”라고 묘사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그들은 맹목적으로 일합니다. ‘더 일할 수 있을까?’, ‘왜 일을 해야 하지?’, ‘다른 방법은 없을까?’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작은 화면 속에서 끊임없이 팔리기 위해 스스로를 반짝이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과정은 자연히 ‘나’를 위한다는 오해를 부릅니다. 그것이 정말 자신을 위한 걸까요? 계속되는 불안 속에서 그저 움직임으로써 불안을 잊을 때도 있지만, 결국 그들은 일로부터 소외당하고, 소진된 몸으로 하이퍼큐비클의 어딘가에서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고 배달하다 누군가의 현관 앞에서 과로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입니다.

회사라는 공간이나 노동의 속성은 백가경의 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동력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노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어떻게 보면 저 역시 이 거대한 하이퍼큐비클 안에서 전전긍긍하며 여름에 에어컨을 켜고 겨울엔 난방을 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존재인데요. 소음이나 요철 없이 일을 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자주 소진시키고요. 퇴근하면 시를 쓸 시간도 에너지도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끔 이런 구조 속에서 형언할 수 없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기이한 분노 같은 걸 느낍니다. 이를테면 시시때때로 일하다 죽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여자들이 애인과 불특정 남성에게 맞아서 죽을 때, 친구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기만 할 때,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내쫓기는 광경을 볼 때, 누군가 쉽게 번 돈으로 대형 건설 기업이 새를 비롯한 여러 동물과 인간의 거처를 싹 밀어내고 세운 초호화 브랜드 아파트를 사고, 숨 쉬듯 쉽게 부자가 될 때, 저는 그런 분노로부터 시를 쓰는 힘을 얻습니다.

글로 세계를 짓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같은데, 왜 어떤 사람은 소설가가 되고 어떤 사람은 시인이 되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시를 쓴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본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들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지 재차, 집요하게 물어오는 이들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공고히 쌓았다고 생각하는 벽돌 벽이 있다면, 그 중간에 뚫린 한 칸의 벽돌, 그 틈새에서 피어오르는 곰팡이처럼, 종국에 그 벽돌 벽을 아주 미세한 터치로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것, ‘그것’을 좇는 자들이 시를 쓰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토킹 큐어’라는 시에서 “그에게 가면을 주어보라, 그러면 진실을 말할 것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시인에게 시는 ‘가면’ 같은 것인가요?

허술한 가면 같습니다. 독자들은 가면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다 알고 있죠. 다만 그 허술한 가면을 들고 서서 저는 소심한 제가 할 수 없는 짓을 즐깁니다. 어쩌면 그게 저일지도 모르는데, 계속해서 시치미를 떼는 것이죠. 저는 앞으로 조금 미친 사람처럼 살고 싶고,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싶은데 “쟤 시 쓴대”라는 말은 그 뒤에 숨기도 좋은 말이고요. 불도저에 탄 듯 밀고 나가기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

자신의 ‘시 찾기 과정’에서 분명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감각은 ‘미스터리함, 기이함과 으스스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감각에 대해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리미널 스페이스’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영어권 인터넷 공간에서 ‘경계에 위치한 장소’를 포착한 밈을 가리키는 용어인데요. 그 이미지의 공간을 보면 친숙하지만 어쩐지 괴리감,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아이러니나 알레고리 같은 문학 용어를 떠올리게 하죠. 안일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만들면서 이미지 속에서 뭔가 훅 튀어나올 것 같아 긴장하게 만듭니다. 꼭 문학 용어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모순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일상이라는 표상 바로 뒤편에 도사린 험한 것, 모순을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형언할 수 없는 찝찝한 감각이라고 할까요.

시적 세계에서 특정 시공간을 건설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인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얼마 전 밀라노 공동묘지 기념공원에 들렀습니다. 1800년대 이탈리아의 건축가 카를로 마차키니가 설계한 공동묘지입니다. 카를로 마차키니 외에도 유명한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애도를 위한 조각상을 많이 남겨놓았더군요. 밀라노에서는 유라시아대륙검은지빠귀,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가 어딜 가나 들리는데, 공동묘지에 있던 새들은 좀처럼 울지 않더라고요. 큰까마귀와 비둘기가 저마다 세워놓은 묘비의 조각상 위에서 털을 고르거나 주위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무릎 꿇고 관을 감싸안은 천사들, 비탄에 젖어 힘없이 주저앉은 소녀상 등 죽음을 기리기 위한 조각들의 표정을 살피며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묘지가 워낙 컸기에 계속 혼자 있는 듯한 감각이 엄습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조각상들의 표정이 어쩐지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 ‘쉼’이라면 어쩌면 저기보다 여기가 지옥일 수도 있겠단 상상도 하게 됐고요. 마침 비가 추적추적 왔고, 짊어진 가방은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공동묘지의 표지판을 읽으니 이곳을 설립한 밀라노 정부 부서 역시 시민들이 죽음과 삶의 경계를 사색하며 산책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엘리베이터에 4층조차 표기하기 겁내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세월호 유가족, 이태원 유가족의 죽음에 대한 애도도 재빨리 끝내게 하지 않았던가요. ‘영감’이라는 말로 설명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저는 죽음이 관통한 장소에서 영향을 받는 듯합니다. 한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어서 이름 붙여진 의정부의 뺏벌, 야만의 시대를 관통한 서대문형무소, 광주의 분수대, 해밀턴 호텔 옆 좁다란 골목, 달력과 시계 모두 4월 16일, 4시 16분에 멈춰진 단원고등학교 교실 등등. 저의 발걸음을 자연히 이끌었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올해 7월쯤 작은 책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어떤 예술가에게 영감을 받나요?

단 한 명을 고르라면 힐마 아프 클린트입니다. 힐마의 전기를 읽거나 그림을 보면 어떤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여성 화가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시절 힐마는 자신의 그림 대다수를 사후 20년 동안 공개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며, 자신을 이해해줄 시대를 예감하고 인내했습니다. 부지런히 작업 세계를 넓혔고요. 현대 들어 힐마의 봉인된 그림이 나타나자마자 미술 역사가 뒤흔들릴 만했고, 공고한 주류 미술계에선 힐마의 위상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지요. 지금은 저처럼 열렬한 팬이 많으니, 힐마의 미학적 업적이 조금은 평가되는 걸까요. 힐마의 그림에는 과학과 수학과 영적인 기호가 부유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넘실대는 아름다운 색과 정상성 너머의 행보가 제게 ‘만드는 태도’를 알려줍니다.

현재 머리맡에 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티머시 모턴의 <어두운 생태학>을 여기저기 가지고 다니며 읽는 중이에요. 그리고 언제나 제 머리맡에 두는 두툼한 책 한 권은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시선집입니다. 어디에도 가지고 다니지 않고 협탁에 놓고 오랫동안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시 읽기의 즐거움이나 시 쓰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온전한 유희의 측면에서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말이 되는 것만 요구하는 여기에서 말 같지 않은 말로 독자를 의외의 지점으로 데려간다는 점입니다.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엉뚱한 단어의 징검다리를 더듬더듬 따라가보는 건 어떨까요. 언어는 그 자체로 한계를 드러냅니다. 언어로 명징할 수 없는 것(혹은 장소)은 ‘언어를 벗어나고자 탈주하는 언어’로만 비로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시가 안내한 장소에 혼자 서서 그 풍경을 둘러보고 조용히 응시해볼 것을 권합니다. 평소에 들리지 않던 숨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고, 의식하지 못하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던전을 헤맬 것이고 그중에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곳을 발견하면 단 한 명의 독자라도 그곳으로 데려가겠습니다.

포토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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