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직구 시대
대중문화에 국경이 없어진 지는 오래됐다. 요즘 소비자들은 유튜브로 미국 토크쇼를 보고, 킨들을 이용해 한국에 발매도 안 된 외국 신간 서적을 읽고, 굳이 힙스터나 마니아가 아니어도 동네 구석구석 파고든 독립서점에 들러 각종 원서를 접할 수 있다. 뛰는 생산자 위에 나는 소비자. 그러니 요새는 자신의 창작물을 오롯이 내수용이라 생각하고 문화 상품을 제작했다간 큰코다친다. 아이돌의 팬들은 음악뿐 아니라 안무, 화보, 스타일링까지 외국에서 베껴온 것을 귀신같이 찾아내 비난하고 논쟁을 일으켜 사과를 받아낸다. SBS <런닝맨>도 최근 후지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게임을 따라 했다가 망신을 당하고 공식사과했다. 이 부분에선 패션 업계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1990년대 일본 예능 카피로 재미를 본 선배들이 아직 업계에 버티고 앉아 그냥 똑같이 만들라고 시키는 게 창피해 죽겠다던 10년 전 어느 방송작가의 말을, 아직도 잡지나 광고 만드는 젊은 에디터들에게서 종종 듣는다. 그리하여 참고만 하라고 있는 시안이 시안이 아닌 게 되어 고스란히 복제돼 잡지에 실리면, 블로거들은 원본과 이를 나란히 올리고 코멘트를 단다. “기왕 따라 할 거면 결과물이라도 더 낫든가.”
외국 콘텐츠를 직접 수용하고 비교·분석하면서 뇌리에 새긴 한국 콘텐츠 생산자들에 대한 불신은 자연스레 ‘직구’라는 적극적인 행태로 이어진다. 아이허브에서 영양제 사는 것처럼 돈과 실물이 오가진 않더라도, 국내 배급업자들의 통역을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문화의 발신지와 소통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물론 코난 오브라이언을 초대한 소녀는 실제 그가 한국에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 정도의 ‘팬질’은 이메일 대신 우표 붙이던 시대에도 흔했다. 하지만 보다 능동적인 움직임도 있다. 예컨대 지난해 G잡지에 여성비하 칼럼이 실렸을 때, M잡지가 강간 살인과 시체 유기를 테마로 화보를 찍었을 때, 성난 독자들은 그것을 실제 제작한 한국판이 아니라 라이선스를 내준 본사 측에 항의함으로써 재빠른 사과를 받아냈다. 삼성 TV가 한국에서 더 비싸다고? 한국 소비자를 무시했어? 좋아, 그럼 미국에서 사버리지! 이런 태도가 콘텐츠 기업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얼렁뚱땅 넘어갈 셈이지? 너희와는 말이 안 통하겠군. 오케이, 선진국의 정의를 보여주지!
비슷한 시기, 외국 생활을 오래 해 영어에 능하고 김연아를 보며 피겨 관계자가 되는 꿈을 키웠다는 중학생 소녀가 ISU 규정집 전문을 번역해 공개한 일이 있었다. 선수들에게 매우 중요한 새로운 채점 규정이 담긴 서류를 빙상연맹이 1년 동안 묵히고 있는 데 대한 반발이었다. 까다로운 용어에 대해서는 전문 해설위원의 자문까지 받았다. 피겨계에서는 과거 빙상연맹의 방만한 운영 때문에 김나영이 러시아 선수권대회에 출전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팬들이 조직위에 직접 서류를 보내 하루 만에 참가 허가를 받아낸 적도 있었다. ‘기관이건 기업이건 언론이건 다 못 믿겠어,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해!’라는 불신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이들의 동기를 전부 설명해주진 못한다.
지난 1월, 아이돌 그룹 트와이스의 쯔위가 <마리텔>에 나와 대만기를 흔든 게 국제적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소속사 대표 박진영은 애를 잘못 키워서 그렇다며 민낯으로 울면서 사과하는 쯔위의 영상을 올려 중국 민심을 달랬다. 그러자 대만의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가 JYP의 홈페이지를 공격했다. 한류가 외국 소비자들의 컬처 직구로 탄생했듯, 불량 문화 상품에 대한 응징도 수용자들의 차원에서, 비공식적이지만 직접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특정 국가보다는 세대 혹은 시대의 특성에 가깝다.
X세대에서 밀레니얼, 이틴즈로 이어지는 요즘 소비 주체들은 과거 비슷한 연배에 비해 높은 학력과 문화적 경험치, 글로벌 마인드를 자랑한다. 인터넷과 SNS는 그들이 대중문화와 지적 콘텐트의 생산과 유통 전 과정을 지켜보고 개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LG전자가 마케팅을 못한다고 ‘대신 마케팅해드립니다’라는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 숨은 기술력과 미담을 찾아 올리고, 이제 막 정치에 나선 표창원이 직접 만든 포스터를 못마땅해하며 수십 가지 버전의 고품격 포스터 디자인을 기부하는 식이다. 그게 요즘 대중에겐 경험이고 놀이다. 여기에 영어를 더하면 컬처 직구의 요건은 모두 갖춰진다. 어설프게 할 거면 비켜, 내 취향은 내가 지킨다. ‘환상 속의 그대’는 정작 전통적인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이른바 전문가나 종사자들이다. 10%의 시청률에 만족하며 90%의 열망을 저버린 채 구닥다리 코미디를 만드는 사람들, 말로는 늘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을 외치면서 모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크리에이터들, 대중의 시민 의식과 문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미디어에 이것은 위기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 글
- 이숙명(칼럼니스트)
- 에디터
- 조소현
- 일러스트레이터
- JO SUNG HEUM
- 포토
- GETTY IMAGES/ IM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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