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roads lead to Rome
로마 트레비 분수 위에 유리 런웨이를 만든 칼 라거펠트. 펜디 창립 90주년 쇼를 위해 마련한 ‘전설과 동화’에 신비로운 패션 요정들과 한예슬을 초대했다.
지난 7월 7일, 펜디의 오뜨 꾸뛰르 쇼를 위해 칼 라거펠트는 전 세계 유명 인사들과 기자들, 톱 모델 군단을 로마로 소집했다. 10년 전 패션 하우스 최초로 중국 만리장성의 성문을 활짝 열며 런웨이 패션쇼를 기획한 그가 90주년을 위해선 브랜드 DNA이자 고향인 로마를 선택한 건 더없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펜디는 2013년 이탈리아의 역사적 유물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트레비 분수 복원 사업인 ‘Fendi for Fountains’를 추진했다. 그해 칼 라거펠트는 로마의 분수들을 촬영한 <물의 영광(The Glory of Water)> 사진전을 파리와 뮌헨에서 열며 로마 분수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는 첨병의 역할마저 자처했다.
한국에서 초대한 셀러브리티는 인형 같은 외모에 모델처럼 완벽한 몸매의 여배우 한예슬이다. 동화 속에서 막 나온 듯한 벨벳 롱 드레스를 근사하게 입고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그녀가 등장하자 플래시 세례와 그녀에게 호감을 사려는 환호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리셉션 파티가 끝난 뒤 해가 저물자 귀빈들은 골목길을 따라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90주년 행사를 위해 펜디 하우스는 트레비 분수 앞에 프런트 로를 준비했다. 포세이돈 석상을 바라보는 계단, 관광객들의 촬영 명당으로 불리는 곳에 좌석이 마련됐다. 한예슬과 소녀시대 티파니는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오른쪽 맨 앞줄에 앉았다. 일찍 온 몇몇 관객은 동전을 분수 안에 던지거나 기념사진을 찍으며 잠시나마 관광객 모드로 돌아갔다. 로마 속설 중에 트레비 분수를 등지고 서서 왼쪽 어깨 너머로 동전 하나를 던지면 로마를 다시 방문할 수 있고, 두 번째 동전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했으니까.
해가 저물 무렵, 쇼 시작을 알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켄달 제너가 걸어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물 위를 걷는 게 아닌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간 예수님처럼 혹은 한국 영화 제목에도 있었던 바로 그 <물 위를 걷는 여자>처럼! 모든 관객들이 탄성을 지르며 자세히 살펴보자, 분수 가장자리의 돌이 아닌, 분수의 물 위에 강화유리로 런웨이를 설치한 것이다. 한때 알렉산더 맥퀸이 대형 공간에 물을 담아 모델들이 첨벙첨벙 물을 차며 걸어 나온 적 있고, 또 샤넬이 풀장 위에 런웨이를 세워 모델들이 등장한 적은 있지만, 이건 누가 봐도 물 위를 걷는 식의 캣워크 (패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런웨이로 기록될 듯!).
“나는 늘 영감을 받는 대상이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낭만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전설과 동화 삽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모든 옷이 서정성을 띠지만 매우 현대적인 깊이를 지녔다.” 칼 라거펠트의 음성이 담긴 프로그램 노트 설명대로 잠에서 막 깬 듯 보이는 펜디 요정들은 트레비 분수의 물 위를 떠다니듯 런웨이를 유영했다.
레이스처럼 섬세하게 가공한 모피 드레스와 자수와 꽃 아플리케 장식, 깃털과 함께 어우러진 시스루 드레스, 자카드 패턴처럼 보이는 모피 코트, 신화를 프린트한 엠파이어 시폰 드레스 등이 쏟아졌다. 자카드와 레이스, 오간자와 시폰 등이 모피인 듯 아닌 듯한 의상과 수작업으로 이어지는 모피 채색 기술과 재단, 조각 등이 펜디의 전통적인 정교한 모피 제작 기법으로 완성됐다. 여기에 파리의 오뜨 꾸뛰르 공방인 르사주와 르마리에에서 만든 깃털과 나비, 오간자 꽃, 비즈 손 자수 등이 한데 어우러졌다. 그야말로 200~600시간에 걸친 수작업으로 만든 장인 정신의 집약체!
라거펠트의 상상으로 탄생한 공주와 요정의 모습을 한 모델들이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와 유리 무대 위에 도열했다. 모델들이 다 섰으니, 유리 런웨이가 깨지진 않을까? 칼 라거펠트는 한 치의 오차나 실수가 없는 인물이란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 늘 그렇듯 칼 라거펠트와 실비아 펜디가 다정한 피날레 워킹으로 마무리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동화 속 왕과 왕비처럼.
밤하늘의 별빛처럼 보이는 조명들이 분수에 반사됐다. 밤 9시가 다 돼서야 쇼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관객들은 입장한 골목 반대편의 작은 골목으로 빠져나온 뒤 로마 시내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보르게세 공원의 핀치오 테라스로 이동했다. 입구에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폴 콕세지 스튜디오가 구상한 설치 작품 ‘Gust of Wind’가 우리를 마중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니 원형으로 된 근사한 디너 장소가 마련됐다. 이윽고 디스코 음악의 상징, 살아 있는 전설인 작곡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의 공연과 함께 펜디의 밤은 막을 내렸다. 시각과 청각에 이어 미각까지 모두 만족스럽던 로마의 밤!
이튿날, 펜디 본사인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 (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로 우리를 초대했다. 웅장한 석상으로 둘러싸인 본사 건물 1층에서는 펜디 모피 역사와 기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 <펜디 로마-꿈의 장인들 (Fendi Roma-The Artisan of Dreams)>이 열리고 있었다. 첫 전시장을 지나면 호화로운 인타르시아(상감기법) 모피 벤치에 앉아 펜디의 모피 진화 과정을 담은 영상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미로’ 방에 들어서면 장인들이 수십 년 동안 모피를 실험하고 연구하며 만든 모피 기법이 전시됐다.
이곳에 전시된 모피 패널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인들의 환상적인 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다음은 ‘강박’ 전시실. 300개 이상의 백버그들이 가득 찬 모피 정글이 거울에 반사되는 이색적인 공간에서 한예슬은 털북숭이 모피 몬스터들을 매만지며 <보그> 카메라를 향해 유쾌하게 포즈를 취했다.
거울 전시실에서 빠져나오면 곧바로 ‘장인 정신’ 전시실로 이어진다. 펜디 장인들의 시연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칼 라거펠트의 스케치가 종이 모형에서 실제 모피 컬렉션으로 완성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장인들의 숙련된 손놀림을 천천히 보고 있자니 각기 다른 소재와 컬러 모피가 이어지는 과정이 마술 쇼를 보는 듯 환상 그 자체.
‘본질’ 전시실엔 아카이브에 소장된 70년대 아스투치오(모피 한 줄 한 줄을 이어 붙인 기법) 모피 의상과 2000년대의 인타르시아 모피 그리고 최신 모피 컬렉션이 마네킹에 전시됐다. 또 바게트와 피카부 등 브랜드를 대표하는 백 라인까지. 그야말로 90년 역사의 창조 정신과 실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웅장한 석상들이 수호신처럼 든든하게 지켜주는 펜디 건물을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박물관에 온 느낌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에 의해 지어졌어요. 1942년 로마에서 열리기로 한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했지만 2015년 펜디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 번도 공식적으로 문을 연 적이 없는 건물입니다.” 펜디 사람들은 박물관 큐레이터처럼 자부심에 찬 어투로 설명을 이어갔다. “지난 10월 이곳으로 본사를 이전한 후 처음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헌정하는 <새로운 로마> 전시를 열었어요. 20세기 로마 건축의 보석 같은 건축물이죠!” 로마 에우르 지역의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팔라초 펜디는 로마의 또 다른 펜디 공화국이었다.
- 에디터
- 김미진
- 포토그래퍼
- KIM BO SUNG, COURTESY OF FE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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