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꾸뛰르 다이어리 – ④ 꾸뛰르 주간 넷째 날
파리 오뜨 꾸뛰르를 취재하기 위해 오랜만에 파리에 왔다. 익숙한 호텔 풍경과 쇼장의 열기, 익숙하지 않은 파리의 여름과 달라진 중국인들의 위상, 프레타 포르테와는 다른 꾸뛰르 쇼의 사소한 풍경들… 한여름 파리 꾸뛰르 주간엔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 ④ 꾸뛰르 주간 넷째 날
7월 6일, 꾸뛰르 주간 넷째 날
10시 18세기 유적, 전쟁기념관 앵발리드에서 열리는 갈리아노의 메종 마르지엘라 쇼가 오늘의 첫 쇼다.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실내로 들어서니 흰 벽만 설치된 미니멀한 쇼장이 나타났다. 와우! 오프닝은 넥과 어깨선이 일직선으로 가파르게 내려온 오렌지색 하프 코트. 뒷모습은 코트를 거꾸로 입은 듯 소매가 바닥을 향해 매달려 있다.
플라스틱 물방울 브라 톱에 플리츠 시스루 드레스, 프랑스 혁명 시대 모자와 함께 나온 해군 장교 코트, 한복 치마처럼 입은 밀리터리 코트 드레스, 가죽 점퍼를 양 소매에 질끈 묶은 흰색 플리츠 드레스, 넉넉한 검정 스커트에 야구 점퍼를 뒤에서부터 걸쳐 입은 듯한 톱, 보풀보풀한 니트 원피스에 폭신한 하늘색 재킷, 실버 코팅의 배낭 달린 후디 윈드브레이커, 점퍼와 스커트를 연결해 걸쳐 입게 만든 아이보리색 펠트 코트, 어깨에서 흘러내린 엠파이어 드레스, 긴 자루를 어깨에 멘 커다란 노란색 매킨토시, 빨강 레이스 트레인이 끌리는 시스루 드레스, 바닥까지 끌리는 니트 소매를 가진 모직 점퍼, 딱 달라붙는 톱과 새 프린트 시스루 스카프 드레스… 하나같이 창의적이고 비범한 스타일링의 룩들이었다.
창의적인 스타일에 어울리게 창의적인 헤어피스들이 제각기 다른 메이크업에 맞춰 제각기 다르게 등장했다. 노트엔 이렇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초현실적 로맨티시즘! 갈리아노가 돌아왔다!” 스타일리스트와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완성도였지만 어쨌든 쇼는 환상이 넘쳤고 볼거리가 넘쳤다. 전성기 시절의 갈리아노 쇼 같았다. 잔뜩 폼 잡고 무대 위를 걸어 나오는 갈리아노는 볼 수 없었지만.
샤넬 화인 주얼리 프레젠테이션 장소인 리츠 호텔로 향했다. 하이 주얼리 숍과 본사들이 모여 있고, 5년간 리노베이션 공사를 거쳐 얼마 전 오픈한 리츠 호텔이 자리한 방돔 광장엔 지금 금빛 밀밭이 꾸며졌다. 도대체 파리 시는 왜 한여름 이곳에 밀밭을 꾸몄을까? 의문은 코코 샤넬이 살았던 아파트처럼 꾸민 리츠 스위트룸으로 들어서면서 금세 풀렸다. 샤넬 하이 주얼리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는 이 럭셔리한 공간은 거실은 물론 침실과 욕실까지 온통 밀 이삭들로 장식됐고, 실내는 풀내음으로 가득했다.
이번 샤넬 화인 주얼리들은 죄다 밀 이삭 모티브의 주얼리들. 생전의 코코는 달리가 그려준 밀 이삭 그림을 비롯, 밀 이삭 모티브의 소품과 가구들로 아파트를 꾸몄고, 거기서 영감을 받아 샤넬 측은 이번 주얼리 신제품의 주제를 밀로 정한 후 아티스트 가드 웨일(Gad Weil)에게 의뢰해 아파트 전체와 방돔 광장 일부를 거대한 밀밭 작품으로 꾸민 것이다. 과연 샤넬! 패션쇼든 하이 주얼리 행사든 뭐든 꺅 소리나게 완성하는 그들. 샤넬이 오늘날 최고의 하우스가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완성도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2시 30분 장 폴 고티에 본사가 위치한 생마르탱으로 향했다. 천장이 높은 돔형 벽면의 쇼장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고티에는 이제 프레타 포르테 쇼를 하지 않고 꾸뛰르 쇼만 열기로 했다.
오프닝 모델로 코코 로샤가 초록 조명 아래 몸에 착 붙는 캣수트를 입고 에스키모 모자를 쓰고 나왔을 때, 10년 전 아이리시 댄서 출신으로 고티에 쇼에서 오프닝 모델로 절도 있게 춤추며 뛰어나오던 그 순간이 오버랩됐지만, 곧 현재로 돌아왔다. 숲이 테마였기 때문에 나무와 땅과 이끼와 관련된 프린트와 컬러들이 가죽과 모피 코트, 시스루 드레스, 팬츠 수트, 원피스 등에 등장했고, 중반 이후엔 빨강 타탄 체크 코트와 드레스, 섬세한 레이스와 반짝이는 라메 소재 바이어스 컷 드레스, 숲 전경이 프린트된 라메 가운 같은 극적인 옷이 등장했다.
하지만 쇼는 긴장감이 없었고 틀어 올리거나 땋아 내린 모델들의 헤어만큼이나 올드하게 느껴졌다. DDP에서 열렸던 고티에 아카이브 전시 중 한 장면 같았다고 할까. 차라리 내 동공을 확장시킨 순간은 얼굴 위 모든 털을 노랗게 탈색하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수주가 새하얀 피날레 웨딩드레스에 새하얀 튤 모자를 쓰고 등장했을 때. 검정 수트를 입은 고티에가 수주의 손을 잡고 피날레 워킹까지 했으니 쇼에 온 보람은 톡톡히 있었다.
4시 정사각형의 단순한 플로어 쇼. 누런 재생지로 만든 초대장이 암시했듯이 쇼는 빅터앤롤프식 리사이클링 쇼였다. 얄밉도록 두뇌 회전을 잘하는 이 네덜란드 남성 듀오는 이번엔 과거 그들의 컬렉션 피스들을 재료로 쓰되 거기에 디킨스풍의 높다랗고 낡은 검정 모자와 납작한 검정 로퍼, 요란한 단추 장식과 반짝이는 금속 · 스팽글 장식을 더해 업사이클링 꾸뛰르의 절정을 보여줬다.
신나는 팝송이 흐르는 가운데 스팽글 장식 진이나 인형 튤 스커트에 천 조각 깔개(어릴 때 부엌 싱크대 아래에서 흔히 보던) 디테일과 켜켜이 자른 러플, 늘어뜨린 튤로 장식한 재킷이나 코트들을 입혀 등장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더 극적인 옷들이 등장했다. 발끝까지 끌리는 풍성한 튤 스커트를 이어붙인 색색의 천 조각 깔개 코트 드레스들! 꾸뛰르의 전통을 살려 그들도 웨딩드레스로 마감했는데, 이 또한 색깔만 흰색일 뿐 천 조각 깔개 디테일의 튤 장식 코트 드레스에 디킨스 모자를 쓴 모습. 과연 뭘 해도 끝장을 보는 빅터앤롤프 쇼다웠다.
다음 행선지는 지방시 꾸뛰르 프레젠테이션 현장. 격자무늬 바닥 위에 두 줄로 나란히 진열된 옷들은 하나같이 당당하고 완벽한 모습. 특히 섬세한 주름 장식의 넥타이 달린 드레스와 지퍼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거울 조각 장식 검정 팬츠 수트가 눈길을 끌었다. 지금 이곳에서 프라이빗한 살롱 쇼가 열려 프레스 키트 속 어여쁜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와 켄달 제너가 번갈아가며 드레스를 입고 사뿐히 워킹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6시 30분 꾸뛰르 주간의 끝을 장식한 쇼는 발렌티노. 발렌티노의 여성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디올로 떠난다. 그들 듀오의 마지막 공동 작품이 된 쇼. 오프닝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풍의 격자 조직 흰색 하이넥이 장식된 검정 팬츠 투피스와 드레스들. 검정 라이딩 부츠의 당당한 워킹만큼이나 위풍당당하고 고급스러웠다.
쇼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와 로미오와 줄리엣 등 셰익스피어 작품 이미지로 좀더 깊숙이 들어갔다. 흰색 하이넥으로 장식된 퍼프 소매 옷들이 등장했을 때가 절정이었다. 중반 이후엔 이브닝 드레스들이 점령했다. 백설공주풍의 드레스들도 나왔지만, 퍼프 소매 검정 시스루와 벨벳 드레스, 흰색 러플 블라우스에 이어 붙인 검정 깃털 풀 스커트 드레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장식의 자카드 코트와 드레스도 등장했다. 마지막은 역시 발렌티노 레드. 레드 시리즈 역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공주와 여왕 혹은 성직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 에디터
- 이명희 (두산매거진 에디토리얼 디렉터)
- 포토그래퍼
- JAMES COCHRANE, LEE MYUNG HEE,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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