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점정 고추장
요즘 뉴욕 셰프들 사이에 고추장이 빤한 매운맛을 탈피하는 대안이자 풍미를 더하는 식재료로 떠올랐다. 뉴욕의 비법 소스로 등극한 라이징 스타, 고추장의 근황.
뉴욕의 핫한 채식 레스토랑 더트 캔디(Dirt Candy)에 갔다가 ‘코리안 프라이드 브로콜리’라는 메뉴를 주문했다. “빵가루를 입힌 브로콜리를 튀겨서, 고추장, 참깨 마늘 드레싱으로 버무림. 당신의 얼굴을 녹일 만큼 뜨거운 상태로 서빙됨”이라는 소개 문구를 재미있어하다가 갑자기 놀란 표정이 됐다. 잠깐, 영어로 ‘Gochujang’이라고 써 있는데 모든 손님이 그게 무엇인지 안다는 거야? 고추장과의 예상치 못한 만남은 계속됐다. 뉴욕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하와이안 날생선 샐러드 ‘포키(Poké)’를 먹으러 포키웍스(Pokéworks)에 갔다가 ‘고추 두부 포키’를 발견했다. 고추를 한국 발음처럼 ‘Gochu’라고 써놓았고 곁들이는 소스명은 재미있게도 ‘Sweet Chili Gochu Sauce’였다. 고추만 한국 발음 나는 대로 표기하는 건 대체 어느 나라 문법일까.
한편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감칠맛에 집중하는 햄버거 체인 우마미 버거(Umami Burger)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 분점을 오픈하면서 새로운 메뉴인 ‘K-BBQ 버거’를 선보였다. 고추장 양념을 바른 패티에, 그 위에 잘게 다진 새콤한 김치를 올린 다음, 고추장을 섞은 케첩으로 마무리했다. 메뉴 설명에 포함된 ‘Gochujang Glazed(고추장을 바른)’와 ‘Korean Ketchup(한국식 케첩)’이란 표현은 고추장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고추장으로 양념한 고기는 유명하므로 온전히 표기하되, 소스가 되려면 다른 소스에 섞어야 하므로 고추장 대신 ‘한국식’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낯선 듯한 메뉴이지만 코리언 프라이드 브로콜리, 고추 두부 포키 그리고 K-BBQ 버거는 양념치킨과 비빔밥, 고추장 삼겹살 등 뉴요커들이 잘 아는 대중적인 고추장 기반 요리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더트 캔디의 셰프 아만다 코헨의 말이 그 연관성을 뒷받침한다. “뉴욕에서 본촌치킨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구상해온 메뉴랍니다. 뉴요커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한국의 맛을 재창조해보고 싶었어요. 프라이드 치킨에서 출발한 프라이드 브로콜리가 그 첫걸음이죠.” 아만다 코헨처럼 현재 뉴욕 셰프들은 한국 고추장 맛을 다른 메뉴에 접목시키는 데 열심이다. 메뉴명에 고추장이 없지만 ‘코리언’과 ‘스파이시’가 포함됐다면 100% 고추장 기반 요리라고 보면 된다. 일례로 강 건너 브루클린에서 카리브 해 스타일의 덮밥을 파는 더 푸드 서먼(The Food Sermon)에서 ‘매운 토마토 소스(Spicy Tomato Sauce)’를 맛보다가 ‘스파이시’ 단어의 주인공이 고추장임을 알게 됐다. 이국적이거나 창의적인 요리를 먹으러 갔는데 어째서인지 고향의 풍미가 느껴지는 상황이 빈번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셰프들이 고추장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고추장 이전에는 스리라차 소스가 있었다. 고추, 식초, 마늘, 설탕, 소금을 섞어 만든 태국산 스리라차 소스는 이제 미국인이라면 모두 알지 않나 싶을 정도로 대중적이다. 핫도그, 햄버거, 샌드위치, 쌀국수뿐 아니라 심지어 시리얼에도 넣어 먹는다. 매운맛이 유행하면서 스리라차가 왕좌를 차지했고 하인즈 케첩이나 A1 스테이크 소스는 재빨리 스리라차 첨가 버전을 상품화했다. 이제는 서브웨이, 맥도날드, 웬디스 같은 거대한 체인점에서도 기본 소스로 제공한다. 이런 스리라차의 빤한 매운맛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셰프들에게 고추장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고추장은 스리라차처럼 쉽게 짜서 음식에 찍어 먹거나 곁들일 수 있는 가벼운 소스가 아니다.
미국 코리아타운 레시피를 집대성한 <Koreatown> 쿡북의 공동 작가 맷 로드버드는 고추장의 맛을 “감칠맛 나고, 다소 (맛있게) 퀴퀴하고, 약간 달고, 사탄의 농장에서나 자랐을 고추보다도 맵다”라고 표현했다. 센 풍미가 어우러진 식재료이기 때문에 그는 “미숙한 셰프들이 다루기엔 힘겹다”고 일축한다. 반면 숙련된 셰프들은 고추장을 다루는 테크닉을 재빨리 익혔다. 매운맛, 단맛, 짠맛, 감칠맛이 공존하는 고추장은 스튜와 고기 양념에 깊은 풍미를 더하는 마법의 소스와 같았다. 한국 슈퍼마켓에 가면 구할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시판용 고추장은 이제 셰프 선반의 필수 식재료로 자리 잡았다.
미국 셰프들이 고추장 레시피에 도전하는 동안, 고추장 달인인 한국계 셰프들은 대중의 입맛을 노리는 고추장 소스 개발에 한창이다. <톱 셰프> 출연진이기도 한 610 매그놀리아(Magnolia) 셰프 에드워드 리는 고추장, 마늘, 참기름, 레몬즙, 꿀, 소금, 후추를 넣은 양념에 버터를 추가하고 ‘고추장 버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남부식 육류 요리에 한국식 양념을 접목시킨 실험적인 메뉴를 선보이는 그는 이제 남부를 대표하는 차세대 셰프로 불린다. 작년에 그는 청정원과 협력해 미국인의 식탁에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세 종류의 고추장 소스를 개발했다. 고추장소스닷컴(www.gochujangsauce.com)을 보면 전통 고추장보다 가벼운 미국식 고추장을 곁들이면 좋을 미국의 기본 음식 리스트가 가득하다.
뉴욕 외식 트렌드를 이끄는 셀러브리티 모모푸쿠(Momofuku) 셰프 데이비드 장은 연구소를 차리고 아시아식 ‘장’을 연구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중 한 결과물이 고추장을 음식에 뿌려 먹을 수 있게 개발한 ‘쌈 소스’다. 쌈장보다 신맛을 가미해 드레싱에 어울리는 소스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모모푸쿠 계열 식당엔 테이블마다 스리라차가 아닌 쌈 소스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고추장은 식당 부엌이 아닌 가정의 부엌에서도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일단 고추장의 미국화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셰프들이 개발한 고추장은 아마존닷컴 및 각종 잡지에서 긍정적인 리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또 힙한 식재료 편집숍을 돌다 보면 ‘위크 니스(Weak Knees) 고추장 스리라차’가 눈에 띄는데 이는 브루클린 부시윅 출신의 스리라차 팬들이 만들어낸 핸드메이드 소스다. 시장을 도배한 스리라차 소스와 차별점을 연구하던 중에 고추장을 발견해 첨가했다가 상품화하게 됐다고 한다. 만든 이들은 블러디 메리 칵테일에 넣어 먹으면 완벽하다고 말한다. 고추장은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점점 미국 가정의 부엌으로 들어가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주말 레시피로 고추장이 필요한 요리를 소개한다는 건 고추장이 기본 식재료가 되었다는 증거다. 다양한 요리 잡지뿐 아니라 요리 웹사이트 혹은 테이스티(Tasty) 같은 소셜 비디오에서도 고추장을 활용하는 레시피가 점점 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세가 있다면, 고추장이 고향을 떠나 고추장의 사촌과 같은 맛이 되어도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집을 떠난 고추장이여, 세상의 미식계에 무사히 정착하기를!
- 에디터
- 조소현
- 글
- 홍수경(칼럼니스트)
- 푸드 디자이너
- 박세훈
- 포토그래퍼
- PARK SAE 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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