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Blue Sky
마이클 코어스의 경험과 세월은 진지하고도 유머러스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무더운 여름날의 태양빛처럼 열정적이고 상쾌한 가을 하늘처럼 청명하다.
파크 하얏트 스위트룸의 통창을 통해 희뿌연 아침 하늘과 한산한 삼성역 사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이클 코어스는 소파에 앉아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돌려 고요히 미소를 지었다. 눈은 창밖 하늘처럼 연하고 투명한 푸른색이다. “가을 단풍을 보러 다시 와야겠어요. 색이 정말 아름답군요.” 그는 마이클 코어스 코리아 론칭을 기념하기 위해 어젯밤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쉴 틈 없이 이어진 스케줄에 따라 맹렬히 달린 후 바로 싱가포르로 떠날 예정이다. 더 이상 시끌벅적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지도, 복잡한 회사 경영에 관여하지도 않지만 여전히 24시간이 모자란 삶이다. 그리고 그에겐 그런 삶이 아직 괜찮아 보인다. 만난 지 고작 몇 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수시로 변수가 발생하는 혼돈 속에서도 더 이상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든다는 건 좋은 일이다. 코어스처럼 유머와 여유를 겸비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순 없다.
VOGUE KOREA(이하 VK) 서울 방문은 몇 번째인가요?
MICHAEL KORS(이하 MK) 두 번째예요. 어젯밤에 도착했죠. 첫 방문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그동안 새로운 건물도 많이 들어섰고요. 아시아 국가를 방문할 때면, 특히 최근에 다시 방문한 나라의 경우 새로운 도시가 생겨난 것처럼 보여요.
VK 마이클 코어스 컴퍼니는 최근 주식을 상장하고 주가가 뛰어서 상당한 이익을 냈죠. 사람들은 당신을 억만장자라고 부르던데, 억만장자의 삶이 어떤지 궁금해요.
MK 재미있죠. 처음 회사를 시작할 때 직원은 겨우 네 명이었고 내가 모든 걸 직접 처리해야 했는데. 나는 늘 고객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왔어요. 그들의 생활 방식은 어떤지, 그들에게 필요한 게 뭔지 눈여겨봤죠. 과거에도 자주 여행하면서, 물론 당시에는 주로 국내를 돌아다녔지만, 곳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봤답니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차이점이라면 회사가 세계적인 규모로 커졌고, 당시엔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이제는 “지하철은 타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정도죠.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하고 여행하며 눈을 늘 크게 뜨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게 억만장자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나는 여전히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어요. 물론 일도 열심히 하고요! 내가 누구를 위해 디자인하느냐와 내 주변에 대해 생각해봤을 때 많은 게 달라졌다고 여겨지지 않는군요.
VK 그럼 36년 전에 당신이 처음 디자이너로 데뷔할 당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디자이너로 데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가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의 던 멜로(Dawn Mello)라고 들었어요.
MK 내가 뉴욕의 작은 부티크에서 디자인을 하던 때였죠. ‘로타스(Lothar’s)’라는 이름의 숍이었고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 건너편에 있었어요. 그리고 난 그 매장의 모든 일을 다 했답니다! 디자인도 하고, 손님들에게 옷도 팔고, 쇼윈도의 마네킹에게 옷도 입혔죠. 던 멜로는 당시 버그도프 굿맨의 패션 디렉터였는데, 하루는 내가 쇼윈도 안쪽에서 마네킹에 옷 입히는 걸 지켜보다가 매장 안으로 들어오더군요. 그녀는 내가 쇼윈도 디스플레이 담당이라고 생각했지, 디자이너일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물었죠. “누가 이 옷을 디자인했죠?” 그래서 “저예요”라고 답했어요. 그러자 멜로가 말했어요. “아니, 당신은 디스플레이 담당이잖아요.” “이곳 일은 제가 전부 다 하는걸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어요. “길 건너편에서 지켜봤는데, 당신 옷이 마음에 들어요. 만약 컬렉션 작업을 하게 되면 꼭 나한테 연락해요. 아주 관심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난 그날 밤 집에 가서 바로 스케치를 시작했답니다! 그동안 내 컬렉션을 선보이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 그녀에게 용기를 얻어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된 거죠.
VK 나는 당신이 일하던 부티크가 하이엔드 레이블을 파는 곳인 줄 알았어요.
MK 그랬어요. 내가 그곳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땐 프랑스 컬렉션들이 있었죠. 타이다이 진, 스키복 같은 매우 캐주얼한 프렌치 스포츠웨어였어요. 당시 난 대학생이었는데 재키 케네디부터 루돌프 누레예프, 골디 혼, 다이애나 로스, 셰어 전부 로타스에 쇼핑을 하러 왔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장 주인은 타이다이 유행이 끝났음을 감지했고 내게 “네 작업실을 마련해줄 테니 인하우스 컬렉션을 만들어볼래?”라고 제안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죠. 더 이상 타이다이 룩은 없었어요. 난 카테고리별로 정리해서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브닝 웨어, 사무실에서 입을 수 있는 테일러드 룩 등.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VK 그렇게 멋진 부티크에서 어떻게 일하게 된 거예요?
MK 오, 그 일자리를 얻게 된 사연은 정말 웃기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이야기 하나씩은 갖고 있기 마련이죠. FIT에 막 입학하던 무렵이었어요. 난 학비 때문에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의류 매장에서 일하고 싶었죠. 당시 헨리 벤델 매장이 57스트리트에 있었고 버그도프 굿맨 백화점도 57스트리트에 있었어요. 그 두 매장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두 곳 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고용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난 몹시 실망했죠. 그리고 로타스 부티크가 그 두 매장 사이에 있었어요! 난 항상 로타스의 타이다이 진을 갖고 싶어 했는데, 정말 비쌌죠. 나는 매장에 들어가서 몇 벌을 입어보기 시작했어요. 물론 살 수 없었지만요. 그리고 판매 직원 중 한 명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죠. “여기서 일하는 건 정말 멋질 거 같아요. 이 옷을 다 입고 일할 수 있잖아요.” 그러자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사실은 판매직 자리가 하나 났는데, 아르바이트 자리요.” 난 숨을 들이켰죠. “그럼 직원 할인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당연하죠, 할인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어요. “게다가 한 벌은 공짜예요!” 난 재빨리 외쳤죠. “저요, 제가 일할게요!”
VK 판매 직원으로 시작해서 디자이너가 됐다니 놀라워요. 주인이 당신에게 포트폴리오를 보여달라고 한 거예요?
MK 재미있는 건 그들이 단 한 번도 포트폴리오를 요구하거나 디자인 스케치를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저 내가 일하는 걸 지켜봤을 뿐이죠. 다른 디자이너의 의상까지 바꿔버리는 모습을요. 난 마네킹에 옷을 입히면서 다리 부분에 슬릿을 넣거나 옆 부분을 묶고 벨트를 더하는 등 그 옷이 보이는 방식을 종종 바꾸곤 했거든요. 그들은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옷에 대해 확고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또 고객들과 사이가 좋다는 것도요. 내가 옷을 추천하면 대부분이 실제로 그 옷을 입었거든요. 내게 기회를 준 거예요. 운이 좋았죠, 당시 난 고작 19세였으니까요. 도나카란 같은 디자이너와 인터뷰할 때도 포트폴리오를 보여줬지만 로타스 주인에게는 단 한번도 보여준 적 없어요.
VK 당신의 첫 컬렉션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MK 컬렉션 전체가 검은색과 갈색이었어요. 그리고 딱 두 사이즈만 만들었죠, 프티와 스몰. 그 외에는 없었답니다! 대부분 세퍼레이트 피스였고 드레스는 없었어요. 캐시미어, 가죽, 스웨이드, 실크, 샤르뫼즈 등 지금도 애용하는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들었죠. 당시 안나 윈투어가 <뉴욕 매거진>의 패션 에디터였는데, 보통 9월호에는 가을 시즌에 주목할 새로운 것에 대한 기사를 다루곤 했어요. 새로 개봉한 영화,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 극장, 예술계의 새로운 이슈 같은 것을요. 난 그해 가을 안나 윈투어가 뽑은 패션계의 신인 디자이너였답니다. 나의 첫 컬렉션은 지금처럼 글래머러스하고 고급스러운 동시에 캐주얼하고 편안한 룩이었어요. 마치 음과 양이 공존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여전히 그걸 추구하고 있습니다.
VK 당시에도 마이클 코어스 우먼에 대한 특정 이미지를 갖고 있었나요?
MK 난 확고한 의견과 자신만의 스타일 감각을 지닌 어머니와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항상 간결함의 가치를 믿어왔어요. 간결해야 여자들이 그걸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로타스의 고객들은 전 세계에서 왔고 연령대도 다양했어요. 20대와 60대가 공존했고 아시아, 유럽, 미국 등 국적도 제각각이었죠.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신체와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무엇이 어울리는지 아는 여자들은 아름다운 동시에 기능적인 옷을 원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 레이블을 처음 시작할 때도 우리 고객은 늘 바쁘고 여행을 많이 하며 기능을 중시하는 이들이었어요. 지금도 그건 바뀌지 않았죠. 삶은 더 빨라지고 더 복잡해졌으니까요.
VK 당신의 이야기는 로맨틱하게 들리네요.
MK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난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나 자신도 일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19세는 디자이너가 되기에 정말 어린 나이죠. 그래서 늘 말하곤 합니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눈을 크게 뜨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라고요. 나는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지 않아요. 행운은 직접 만드는 거라고 믿죠.
VK 그때에 비하면 지금 패션계는 꽤 냉혹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MK 재미있는 건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가 오히려 빠른 시간 안에 이름을 알리기 더 힘들었다는 거예요. 내 회사가 탄탄하게 자리 잡아서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조차 난 여전히 젊은 디자이너라고 불렸으니까요. 그리고 15년 후에 40대가 됐을 땐 “오, 제발 날 젊은 디자이너라고 불러줘요, 아직도 젊은 디자이너이고 싶어요!”라고 말했지만요. 지금은 세간의 관심도 너무 많고 스포트라이트도 너무 많이 쏟아져요. 어쩌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너무 이른 시기에 주목을 받는 거죠. 내게는 차근차근 단계를 다지고 고객들에게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끼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어요. 지금은 매우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모든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 연예인, 공연자, 예술가 모두 너무 빨리, 너무 많은 주목을 받고 있어요. 자신이 충분히 준비됐는지 확신하기 어렵죠. 나만 해도 레이블 론칭 후 3년 동안 패션쇼를 하지 않았어요. 기다렸죠. 고객층이 충분히 형성됐는지, 제대로 옷을 만들고 있는 건지 확신을 갖고 싶었거든요. 요즘 디자이너들은 데뷔하자마자 성대하게 패션쇼를 열고서 어쩔 줄 몰라 하죠. “오, 어떡하지. 이제 이 옷을 제작해야 해!” 난 젊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이 인내심을 가지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모든 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죠. 그리고 누구나 오래 지속되길 원하니까요.
VK 이런 시기에도 당신의 최신 컬렉션은 아주 달콤하던데요.
MK 오 마이 갓! 최신 컬렉션이라면 어느 컬렉션을 말하는 거예요? 2017년 봄 컬렉션에 대해 얘기하는 거죠? 그래요, 그게 나한테는 최신 컬렉션이죠. 봄 컬렉션 작업을 시작할 때 낙관주의와 기운에 대해 생각했어요. 복잡해진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이 옷을 입을 때 스스로에 대해 기분 좋게 느끼고 긍정적인 기운을 얻게 하자고 방향을 잡았죠. 에너지를 불어넣을 로맨틱한 요소가 필요했고 옛날 여배우들을 참고했습니다. 40년대 바바라 스탠윅이나 로렌 바콜 같은 강인한 여성들, 도발적이면서도 여성스러운 캐릭터 그리고 80년대 <LA 컨피덴셜>의 킴 베이싱어처럼 강렬하고 영향력 있는 여자를요. 거기에 도회적인 날렵한 어깨선과 늘씬한 허리 곡선을 더해 여성스러움과 힘을 결합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VK 꽃무늬도 아주 많았죠.
MK 마이클 코어스 고객 대부분은 대도시에 살아요. 서울, 런던, 뉴욕, 도쿄 전 세계 어디든 비슷하죠. 항상 서두르고 질주하는 도시의 삶은 자연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합니다. 나도 정원을 좋아해요, 최악의 정원사지만요. 우리 뉴욕 집에 정말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다는 게 유감스러울 정도죠. 꽃무늬는 이러한 자연에 대한 환상, 꽃과 색의 폭발을 도시 생활로 가져오는 방법이었어요. 옷장 속에 나만의 식물원을 가지는 거죠.
VK 당신은 뉴욕 집의 정원을 직접 가꾸나요?
MK 아~니요. 그렇지만 정원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죠. 지난봄에 한창 컬렉션 작업을 하던 때였어요.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가정부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정원에 딸기 봤어요?” 그래서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죠. “우리 정원에는 딸기가 없는데.” 그러자 그녀가 “아니에요, 있어요. 심지어 아주 많아요!” 난 여태까지 몰랐다는 데 충격을 받았고 가정부는 얼른 나와 보라고 말했죠. 난 작은 가위를 들고 테라스로 나가서 그 멋진 딸기를 전부 땄어요. 너무나도 흥분해서 “우아, 이게 전부 내 딸기라니!”라는 생각에 사진도 엄청 많이 찍었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참석한 파티에서 우연히 마사 스튜어트를 만났어요. 그녀와는 매우 오래된 사이죠. TV 프로그램에서 함께 요리한 적도 있거든요.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어요. “마사,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어요!” “뭔데요?” 나는 “이것 좀 봐요, 우리 정원에서 딴 거예요”라고 말하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보여줬죠. 그러자 그녀가 딸기의 종자 같은 구체적인 것에 대해 질문을 퍼붓기 시작하는 거예요. 알다시피 그녀는 진짜 정원사잖아요? 결국 난 계속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어요. “이건 내 딸기예요, 그게 내 답이라고요! 뉴욕 시에서 자란 딸기요!”
VK 아무리 생각해도 딸기가 자라는 동안 전혀 보지 못했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
MK 그러니까요.(한숨) 말도 안 되죠. 그렇지 않아요? 정원사가 만들어준 차트도 있거든요. 직접 정원의 꽃을 꺾어다가 꽃병에 꽂을 때가 있는데, 아파트에 온 사람들이 무슨 꽃이냐고 물어볼 때를 위한 거예요. 그러면 난 “잠깐만요”라고 말하고 재빨리 차트를 찾아본답니다. 그리고 으스대며 말하죠. “그건 화이트 라일락이에요. 퍼플 라일락이 아니죠”라고요. 만약 여유가 있다면 꼭 배우고 싶어요. 그렇지만 정말 시간이 없네요.
VK 그래요? 난 당신이 예전보다 여유 시간이 더 많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MK 그렇지 않아요, 전혀요. 더 적어졌어요! 사실 예전에도 늘 바쁘다고 생각하긴 했죠. 아마 90년대 초였을 거예요. 사람들한테 우리는 너무 바쁘다고 말한 게 기억나요.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액세서리 라인도 없었죠. 출장도 가지 않았어요. 1년에 네 시즌이 아니라 두 시즌만 작업했고요. 90년대 들어서면서 해외 출장을 가기 시작했어요. 일본 기업에서 론칭한 ICB 컬렉션 작업도 맡았고 90년대 후반에는 셀린 컬렉션을 하면서 파리로 통근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깨달았죠. 그동안 전혀 바쁜 게 아니었다는 걸요. 물론 그럼에도 끈기와 인내를 길러야 해요. 그렇지만 여유 시간은 없는 게 현실이죠.
VK 셀린 시기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당신의 마지막 셀린 컬렉션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어떻게 프랑스 하우스와 일하게 됐나요?
MK 내가 디자이너로 데뷔할 당시 패션에는 아주 엄격한 국경이 있었어요. 브랜드의 태생대로 미국 디자이너는 미국인, 유럽 디자이너는 유럽인, 아시아 디자이너는 아시아인을 위해 디자인한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었죠. 파리에서 패션쇼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나는 미국인인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90년대가 되자 국경이 무너지기 시작했죠. LVMH가 내게 제안해왔고 솔직히 잘해낼 거라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두 번의 패션쇼를 하고 뉴욕과 파리를 계속해서 오가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늘 패션은 새로운 걸 경험하고 다른 걸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어요.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걸 배우고 다른 도시의 삶을 본다는 데 흥미를 느꼈죠.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건 파리에 자리 잡으면서 실로 세계는 아주 작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뉴욕에서 반응이 좋은 건 파리, 서울, 도쿄, 시드니에서도 반응이 좋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또 액세서리의 힘에 대해서도 배웠죠. 잘 어울리는 핸드백, 멋진 신발, 아름다운 주얼리, 선글라스 같은 것이 토털 룩을 완성한다는 걸요. 디자이너로서 많은 걸 배우는 기회였습니다. 디자이너라면 항상 내가 다른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다른 무엇을 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고 새로운 것이 패션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니까요.
VK 그렇다면 셀린을 떠난 이유는 뭔가요?
MK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어요. 셀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낸 마지막 해에 난 파리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열세 번 탔죠. 사실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갑작스럽게 콩코드 운항이 중단됐죠(콩코드 여객기는 파리와 뉴욕 구간을 3시간대에 주파했다). 콩코드가 있을 땐 단 이틀을 위해서 파리에 가기도 했거든요. 그리고 마이클 코어스를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야 할 때라는 판단이 섰죠. 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부을 시기라는 걸요. 나는 반반씩 나누긴 싫었어요. 하나에 온전히 모든 힘을 쏟아붓고 싶었죠.
VK 그렇게 성장한 당신의 레이블은 아메리칸 럭셔리 스포츠웨어를 대표하죠. 당신은 아메리칸 스포츠웨어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MK 오늘날의 패션은 전부 스포츠웨어를 지향하고 있어요. 참 낯선 세상이죠. 조깅 팬츠, 스웨트셔츠라니. 물론 우리 컬렉션도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아우릅니다. 이브닝 가운부터 주말을 위한 옷, 사무실에 출근할 때 입을 옷 등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모로 입을 수 있는 룩을 선보이죠. 나한테 스포츠웨어란 활동적인 태도, 편안함, 다용성을 의미합니다. 바쁘고 빠른 일상에 적합한 패션은 원래 미국인의 것이었어요. 뉴욕에는 꾸뛰르도 없고 야회복에 대한 역사도 없죠. 그 대신 빠르게 움직이는 삶에 대한 역사가 있어요. 자연스럽게 빠른 삶에 적합한 패션이 발달한거죠. 지금은 전 세계의 삶이 대도시와 지방 소도시의 구분 없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실제 그 속도를 따라잡는 걸 도와주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시대에 맞게 멋져 보이는 동시에 기능성을 갖춘 옷과 액세서리입니다. 기능과 스타일의 결합, 그게 바로 오늘날의 스포츠웨어죠.
VK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을 할게요. 마이클 코어스는 대중에게 하이엔드보다 합리적인 가격대의 제품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이러한 접근에 대해 패션계에는 상반된 의견이 존재합니다.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요.
MK 나한테 중요한 건 내가 패션과 스타일의 민주화를 지지한다는 거예요. 나는 악어가죽 신발을 좋아하고 진도 좋아해요. 티셔츠도 좋아하고 캐시미어 코트도 좋아하죠. 나는 한 사람의 소득이 그 사람의 우아함을 결정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플립플랍부터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한 비즈 가운까지 모든 걸 생각할 수 있는 게 좋아요. 실제로 우리 고객은 두 가지를 동시에 즐길 줄 아는 이들이고 내 디자인과 다른 디자이너의 것을 매치해서 입은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요. 왜냐하면 내가 작업한 게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난 마이클 코어스 컬렉션을 일종의 실험실이라고 여겨요. 현실적인 동시에 새로운 것을 제한 없이 시도할 수 있는 연구소죠.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는 피트니스센터와 사무실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위해 접근 가능한 백이 맞아요. 우리 회사에서는 그 둘이 균형을 잘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특정 가격대나 특정 브랜드의 옷만 입어야 한다는 건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나 자신조차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죠. 엄청나게 비싼 고가의 아이템을 빈티지나 중간 가격대의 체인점 아이템과 섞을 수 있어요. 나는 그게 오늘날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디터
- 송보라
- 포토그래퍼
- KWAK KI GON
- 모델
- 권지야, 김은해, 선윤미, 서유진, 한성민, 최예나, 고가영, 수주
- 헤어 스타일리스트
- 김선희, 장혜연, 박희승
- 메이크업 아티스트
- 이자원, 김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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