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With The Show
엠마 스톤이 〈라라랜드〉의 미아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패리스 힐튼의 파티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기억. 오스카 후보가 됐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인터뷰어와 볼링을 치고, 애프터 파티에서 탬버린을 흔든다.
엠마 스톤(Emma Stone)이 엠마 스톤이 되기 전의 이름은 에밀리 스톤이었다. 그녀는 애리조나 주 스코츠데일 출신의 10대 배우 지망생으로, 엄마와 할리우드로 이사 와 파머스 마켓 인근에 있는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생활했다. 벽에 존 레넌의 포스터를 붙이고, 향을 피우고(“열여섯 살이었으니까요”라고 그녀는 항변한다), 빨간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오디션을 보러 가고, ‘스리 도그 베이커리(강아지 쿠키를 파는 제과점)’에서 일하면서 말이다.
스톤은 연예계에서 성공하겠다는 희망찬, 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힘든 꿈을 안고 해마다 LA로 오는 수천 명의 새로운 얼굴 중 하나였다. 얼마 전까지 스톤도 그랬다. 11월에 28세가 된 그녀는 아직도 스리 도그 베이커리에서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이 뭔지 안다. “강아지용 팝 타르트(Pop Tarts)죠. 강아지용 오레오도 있고요. 어떤 엄마는 아이를 위해 그걸 사기도 했죠. 강아지용 오레오가 건강에 더 좋다고 여긴 거 같아요.” 할리우드가 할리우드인 이유는 강아지용 오레오를 팔던 사람이 선셋 대로의 광고판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톤은 최근 낭만적이고 영리한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에 출연했다. <위플래쉬>를 만든 천재 감독 다미엔 차젤레가 연출한 <라라랜드>는 배우를 꿈꾸는 미아(엠마 스톤)와 재즈 클럽의 주인이 되고 싶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이야기다. <라라랜드>는 과거 영화 스튜디오에서 늘 만들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만들지 않는 그런 종류의 영화다. 스톤과 고슬링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리피스 천문대의 별들 사이를 날아오르고, 사랑에 빠진다. 미친 듯이 편집된 프랜차이즈 영화 시대에 <라라랜드>는 복고적(MGM표 뮤지컬의 전성기와 프랑스 뉴웨이브 감독인 자크 데미가 생각난다)인 동시에 급진적이다. 이 작품이 지난해 8월 말 베니스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을 때 관객들은 10분간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스톤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제74회 골든 글로브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탔다). 텔류라이드(콜로라도 주의 도시)와 토론토에서도 비슷한 찬사와 상이 이어졌다. 스톤과 작품 전체를 두고 일찌감치 오스카 수상을 점치는 말이 무성했고 톰 행크스는 시사회를 본 후 말했다. “이런 멋진 작품을 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겁니다.”
<라라랜드>는 스톤에게 또 하나의 도약이 될 것이다. 나는 스톤이 스타가 됐음에도 초심을 잃어버린 적이 없음을 말하고 싶다. 배우 맥아이작은 “스톤은 전혀 가식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2007년 <슈퍼배드>의 대본 리딩 때 스톤을 만나 룸메이트가 됐다. 개봉을 앞둔 <배틀 오브 더 섹시스>에 함께 출연한 사라 실버맨은 스톤을 “얼굴은 인형 같은데 상당히 터프하다”고 묘사했다. 스톤은 ‘SNL’의 명예 멤버다(두 번 호스트를 했고, 카메오도 했다). 각종 버라이어티 쇼에 나와 립싱크 배틀을 하고 플라스틱 통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프린스를 위해 피 나는 발로 탬버린를 치기도 했다(이 얘기는 나중에 좀더 하겠다). 내가 본 스톤은 로버트 드 니로를 ‘바비’라고 부르거나, 파파라치를 쫓으려고 가발을 쓰거나 분장을 한 적 없다. 스톤은 개인 헬리콥터와 공룡 컬렉션을 갖고 있지만 자랑하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도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을 믿겨 하지 않는다. 여전히 격식을 차리는 파티가 불편하고, 레드 카펫에서 포즈를 취하는 게 낯설다.
우리는 LA 로스펠리스에 있는 레스토랑의 칸막이 자리에 앉아 있다. 조금 있으면 18달러 균일가로 제공되는 저녁 메뉴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스톤은 뉴욕의 브루클린 다이너에서 다미엔 차젤레의 <라라랜드>에 대해 들었다. 얼마 후 그녀는 LA로 돌아와 노래와 춤 리허설을 했다. 그녀는 “그 작품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미엔이 너무 열정적이었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하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제가 40배는 더 흥분했죠.”
“스크린에서 노래와 춤과 그 밖의 모든 것을 해야 하는 창작 뮤지컬은 스톤에게 큰 변화였어요”라고 차젤레는 말한다. “하지만 엠마는 뛰어난 코미디언이고 엄청난 존재감이 있죠. 모든 음역을 커버할 수 있고요.” 처음부터 차젤레는 <라라랜드>의 곡을 50년대 스타일의 와이드 스크린 시네마스코프를 이용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촬영하고 한 테이크 안에 담길 바랐다. 그러려면 엄청난 연습과 노하우와 ‘쇼를 올려보자!’는 투지가 필요했다. “엄청난 준비, 엄청난 연습, 엄청난 리허설을 했어요. 카메라도 무용수처럼 안무를 짜서 움직여야 했습니다.”
스톤과 고슬링이 함께 2011년 작 <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와 2013년 작 <갱스터 스쿼드>에서 호흡을 맞춘 것이 도움이 됐다. “이 모든 미친 짓, 볼룸 댄스를 배우거나 라이브로 듀엣을 할 사람이 친구여서 좋았어요”라고 스톤은 말한다. <라라랜드>의 안무가인 맨디 무어(가수 맨디 무어와 다른 인물)는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은 이미 통하는 게 있었어요.” <라라랜드>에서 극 중 미아와 세바스찬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주차해둔 차를 찾는다. 해 질 녘이었고 LA의 하늘은 아름답고 생생한 보라색이었다. 그리고 노래 ‘A Lovely Night’이 이어진다. 고슬링과 스톤은 탭 댄스를 추다가 빙글빙글 돈다. 그리피스 공원에서 이틀 밤에 걸쳐 매직 아워(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황혼 시간대)에 촬영한 이 장면은 6분 정도 이어지는데, 아주 꼼꼼한 계획과 많은 운이 필요했다. 고슬링과 스톤이 마침내 그 장면을 해냈을 때 “모든 사람이 환호했다”고 스톤은 말한다.
스톤은 자신이 미아였던 시절(모욕적인 오디션장을 오가고, 패리스 힐튼의 파티장에서 존재감 없던 이방인이었던)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톤이 독백 대사를 기억하지 못하자 소리를 지르던 여성도 있었다. “정말 기이했어요.” 알다시피 지금은 성공했을지라도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게 배우의 운명이다. 스톤은 자신의 고민이 ‘내가 어떤 배역을 맡을 수 있을까?’에서 ‘내가 어떤 배역을 원하는가?’로 바뀌었지만, 자칫 실수하면 강아지 쿠키 가게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칫하면 아무도 날 고용하지 않고, 다시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다고요.”
내가 스톤을 처음 만난 건 2014년 초겨울이었다. 우린 곰을 만들고 있었다(정말 곰 인형을 만드는 매장에서 만났다). 우리 집 아이들은 엠마가 “이제 잘 시간이야”라고 녹음해준 곰 인형을 갖고 있다. 당시에 스톤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쳐 낙담하고 있었다. 샘 멘데스와 롭 마샬이 공동 연출을 맡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린 <캬바레>의 샐리 보울스 역을 놓친 것이다. 스톤은 10대 시절에 그 작품을 봤다. 자신에게 배우의 꿈을 갖게 해준 작품 중 하나였다. 그녀는 런던으로 날 아가 멘데스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고 역할을 따냈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에 전념하느라 출연은 무산됐다. 결국 그 역은 미셸 윌리엄스에게 돌아갔다. “미셸 윌리엄스는 정말 잘할 거예요”라고 당시 스톤은 상냥하게 말했다. 샐리를 연기할 가능성에 대해선 “아직 유효해요. 언젠가는요”라고 말했다. 그 ‘언젠가’는 일찍 왔다. 윌리엄스는 7개월 동안 <캬바레>에 출연했다. 그해 11월에 ‘스파이더맨’에서 자유로워진 스톤은 스튜디오 54 극장에서 샐리 역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한다. 스톤은 공연 기간 동안 독감으로 고생했지만 평은 아주 좋았다. <뉴욕 타임스>의 벤 브랜틀리는 스톤이 연기한 샐리를 “심장이 쿵쾅대는 아드레날린”이라고, <뉴욕 포스트>는 “환상적일 정도로 자신감 넘친다”고 평했다. 그녀가 차젤레와 <라라랜드>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나눈 것도 <캬바레>에 출연 중일 때였다. <캬바레>는 그녀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저는 예전보다 더 많은 준비가 됐다고 느꼈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눈 얘기 중에는 <버드맨>도 있었다. 브로드웨이 연극계의 뒷얘기를 그린 화제작으로 2015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스톤은 이 작품에서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의 고통받는 딸 역을 맡아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처음으로 오스카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스톤은 비즈로 장식한 녹색 엘리사브 가운을 입고 엄마와 함께 오스카 시상식에 참석해 마음껏 즐겼다. <보이후드>로 엄청난 사랑을 받은 패트리샤 아퀘트가 여우조연상을 받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실제로 아퀘트가 받았다). “스트레스는 전혀 없었어요. 엄마와 저는 맨 앞줄에 앉았고 마음껏 즐겼죠. 당시는 <레고 무비>의 해였기 때문에 저는 레고로 만든 오스카를 받았는걸요.”
스톤은 오스카 시상식 한 주 전에 뉴욕에서 열린 ‘SNL’ 40주년 기념쇼에 출연했다. 센트럴 파크 인근의 플라자 호텔에서 역사적인 애프터 파티가 열렸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녀가 피 나는 발로 프린스를 위해 탬버린을 친 것도 그때였다. “춤을 추려고 신발을 벗었어요. 저는 파티에서 늘 춤을 추거든요”라고 스톤은 그 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깨진 유리를 밟은 거예요. 저는 걸어 나가면서 사방에 피를 흘렸죠. 플라자 호텔 직원이 제 발에서 유리를 빼냈어요. 그리고 60초 후에 프린스가 무대에 올라갔어요. 누군가 ‘올라가서 탬버린 칠래요?’라고 물었죠.” 이젠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프린스를 위해 스톤은 탬버린을 쳤다.
조만간 스톤은 <배틀 오브 더 섹시스>로 우리를 찾아올 예정이다. 이 영화는 테니스 스타에서 성 평등 운동가로 변신한 빌리 진 킹의 전설을 담은 작품이다. 부부 감독인 조나단 데이턴과 발레리 패리스가 연출을 맡았으며 스톤에겐 신체적인 변화가 요구됐다. “맙소사, 그녀에게 근육이 생겼더라고요!”라고 73세의 킹이 말했다. 스톤은 “그전에는 실제 인물을 연기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영감을 불어넣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도요. 킹은 폭죽 같은 사람이에요. 대담하고 재미있는 그녀를 사랑해요.” 스톤은 테니스 선수가 되기 위해 정말 열심히 했다. 킹뿐만 아니라 전직 프로 선수였던 빈스 스페이디아와 훈련했다. 물론 <배틀 오브 더 섹시스>는 테니스 경기보다 더 큰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킹의 승리는 미국에서 테니스 열풍뿐 아니라 직장 내 평등한 기회와 임금에 대한 토론을 촉발시켰다. 지금까지도 테니스는 상금 면에서 남녀가 거의 동등한, 유일한 메이저 스포츠이다. 지난해 9월 US 오픈에서 남녀 단식 우승자들은 각각 350만 달러를 받았다. 동시에 동등한 임금은 할리우드를 뒤흔든 주제이다. 스톤의 동년배이자 친구인 제니퍼 로렌스는 함께 출연한 남자 배우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임금 격차를 없애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나는 스톤에게 <배틀 오브 더 섹시스>가 남녀 불평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물었다. 스톤은 “물론이죠”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한 대우와 임금을 받아야 해요. 저는 운 좋게도 남자 배우들과 동등한 출연료를 받았죠.” 그녀는 말을 멈췄다. “운이 좋다고 말할 순 없겠네요. 과거 소수의 작품에서만 남자 배우와 같은 출연료를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업계는 흥행 실적이 좋은가, 관객에게 어필하는 배우인가에 따라 임금이 유동적입니다. 저는 제 에이전트나 변호사에게 그것에 대해 얘기하기가 불편했어요. ‘사람들이 그만큼 나를 보고 싶어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미국 전체의 경우엔 어떻죠? 임금 격차가 75센트 대 1달러라고요? 미쳤군요.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이제 엠마 스톤의 근황을 살펴보자. 그녀는 볼링을 정말 못 친다. 우리는 볼링장에서 만나 피자와 맥주를 주문하고 볼링을 쳤다. 71점. 데킬라 반병을 마시고, 눈을 가리고, 몸을 돌려 다리 사이로 공을 굴렸을 때 나오는 점수다. 물론 우린 위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형편없는 볼링을 끝내고 우리는 동네 산책을 나갔다. 그날 밤 늦게 스톤은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TV 시리즈에 대해 미팅할 예정이었다. 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크루엘라>에서 <101마리 달마시안>의 악녀 크루엘라 드 빌 역을 준비 중이었다. 이것도 있다. 스톤은 현재 솔로다.
그녀는 4년 동안 앤드류 가필드와 사귀었다.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이지요”라고 그녀는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약 1년 전에 이별했다. 그녀는 사생활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다. 솔로 생활보다 볼링장에서의 71점을 더 얘기하고 싶어 했다. “아주 흥미로운 해였어요. 슬프기도 했고요. 장단점이 있어요.”
초저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일터에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기차가 선로 위를 지나갔다. 그중 몇은 따내지 못할 역할을 위해 오디션을 보고 오는 길일 것이다. 스톤은 “<라라랜드>가 자신으로 하여금 LA, 할리우드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베니스 영화제가 끝난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시사회 중간부터 울었어요. 작업을 함께 한 사람들과 이미 영화를 봤는데도 말이죠. 영화는 세상에 나올 때까진 절대 알 수 없는 거 같아요.” 그녀는 눈물을 닦고 친구들과 휴가를 떠날 예정이다. 코펜하겐, 스톡홀름, 파리, 런던에 들를 것이다. 또 LA에서 뉴욕으로 다시 이사한다. 그녀는 LA에서 꿈을 이룬 몽상가 중 한 명이었기에 뉴욕에서 또 다른 <라라랜드>를 시도할 것이다.
- 글
- 제이슨 게이(Jason Gay)
- 패션 에디터
- 토니 굿맨(Tonne Goodman)
- 포토그래퍼
- MERT ALAS & MARCUS PIGGOTT
- 헤어 스타일리스트
- 샤이 애슈얼(Shay Ashual)
- 메이크업 아티스트
- 에런 드 메이(Aaron de Mey)
- 네일 아티스트
- 에미 쿠도(Emi Kudo using Dior Vernis)
- 세트 디자이너
- 안드레아 스탠리(Andrea Stanley@Streeters)
- 프로덕션
- 샤체 크레이머(Shotsie Kramer@First Shot Productions)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