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경의 고공 비행
쉴 틈 없이 고공 비행하던 신세경의 다음 작품은 서울 도심 상공을 배경으로 한 블록버스터다. 그녀는 스타로 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차증을 겪고 있지만, 그 역시 더 자유롭게 날기 위한 과도기 증상일 것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패션왕>의 시청률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은 신세경, 유아인, 이제훈, 유리, 네 청춘 스타가 ‘패션’을 액세서리로 사랑놀음하길 기대했겠지만, 이 드라마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시청자가 젊음과 화려함을 마냥 즐기기엔, 차마 눈뜨고 보기 괴로울 정도로 미묘한 감정과 사건들이 얽힌 구조였기 때문이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쓰기도 했던 김기호 작가는 네 명의 인물이 각자의 사정으로 관계를 맺는 상황(3각 관계와는 차원이 다른)을 만드는 데 도가 튼 사람이다. 심지어 <패션왕>엔 비즈니스라는 거대한 문제까지 투입됐다. 연출진은 신세경에게 이태리 영화 <길>의 젤소미나 같은 느낌을 원했다. “젤소미나는 속이 터질 정도로 순종적인 여자예요. 저는 젤소미나를 생각하며 영걸(유아인)을 향한 마음에 초점을 맞췄죠. 하지만 제작 여건상, 내 감정의 흐름이 명확하지 않은 걸 느낄 때 좀 답답했어요. ‘뭔가 있을 텐데’ 싶었지만, 영걸의 감정 역시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어요. 연기하기에 어려운 지점이 있었죠.” <패션왕>을 본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몸은 그 자체로 여배우의 상(像)이 된다.
이현승 감독이 오랜만에 컴백하는 작품으로 주목 받았던 영화 <푸른 소금> 기자 간담회 때, 송강호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신세경이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내내 웃었다. ‘신세경에게 발판을 깔아주고 싶었다’며 극진히 대해주면서도 귀여운 강아지 보듯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건 진심이었겠지만, 존재만으로 스크린을 장악해버리는 자신 옆에서 역시 주인공을 맡은 어린 여배우를 대접해주려는 제스처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신세경이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드라마는 탄탄하고 긴박한 구성으로 만듦새가 훌륭했고, 한석규는 아주 오랜만에 작품 자체로 회자됐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소이는 신세경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는 설정은 보이는 것 너머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신세경의 느낌과 들어맞았고, 그런 소이에게선 단단함과 외유내강이 배어 나왔다.
“사실 제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편이에요. 최근 작품들을 거치면서 자신감을 조금 잃었어요. 스스로에게 엄격해졌어요.” 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신세경이 자기 입으로 자신감을 내비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신세경의 시기는 여러모로 복잡한 때다. <지붕 뚫고 하이킥>과 <패션왕> 사이, 신세경은 한 작품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으로 올라탔다. 설사 우울한 감정에 푹 빠질지 언정 한번쯤 방점을 찍어주는 타이밍이 있어야 했다. 신세경은 계속 땅에 발 붙이질 못했다.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도 그로 인해 얻는 기쁨은 잠깐이잖아요. 문득 내가 왜,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독한 편이 아니에요. 독하게 살면 뭐해요?” 지난 5월 <패션왕>을 마친 후, 신세경은 오랜만에 조금 휴식할 시간이 생겼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사람은 그 관성 때문에 멈추기도 쉽지 않다.
“작품이 끝나면 예전처럼 친구들과 수다 떨며 신나게 놀 줄 알았는데, 막상 자유 시간이 주어지니 그러질 못하겠더라고요. 온전한 내 시간을 누리기가 쉽지 않았어요. 지금 차근차근 회복해 가는 중이에요.”
어느 순간 스타로 올라서면 겪을 수밖에 없는 지각변동이 있다. 숨 돌릴 틈이 생긴 스타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후폭풍을 겪고 있는지 깨닫는다. 신세경이 사로잡힌 생각은 대중이 생각하는 자신과 실제 자신 사이의 괴리 같은 뻔한 문제는 아니다. “사람과 관계 맺는 건 세상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큰 행복도, 가장 큰 절망도 그를 통해 얻잖아요. 하지만 제가 맺는 관계를 자꾸 의심하도록 만드는 주변의 조언과 상황이 생겨요. 간단한 예를 들자면, 친밀해진 사람에게 내 이야길 털어놓을 때, 그런 행동을 조심하라고 하는 주위의 말들이죠.” “배우는 좋은 캐릭터를 만나야 한다는 명제가 왜 당연한 덕목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주로 멋지고 달달한 작품들을 통해 판타지나 심어주고, 좀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캐릭터가 좋은 캐릭터라고들 해요. 그렇게 사랑받는 캐릭터에 임하면 자기 만족을 얻는 게아니라 광고가 많이 들어오겠죠. 그럼 <도가니>의 장광 선생님이나 <다크 나이트>의 조커같은 역할은 누가 맡나요?”
해맑게 고공비행을 즐기고 있진 못하지만, 똘똘하고 사려 깊은 말들로 오히려 안심을 주는 신세경은 지금 시차증을 겪고 있는 것이다.그녀가 <푸른 소금>을 마치고 군 입대를 앞둔 정지훈과 영화 <비상>을 찍는다고 했을 때, 내용이나 역할에 상관없이 신세경의 상황과 맞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한창 비상 중이었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 상공을 배경으로 한 이 대작은 그 큰 규모가 감당해야 할 후반 작업 때문에 개봉 시기가 늦춰져, 8월 중에야 공개된다. “영화에 같이 출연한 오달수 선배님이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회식을 하면서 이 영화를 고른 이유를 얘기하시는데, 시나리오에서 ‘창공’이란 단어를 발견하고 너무 맘에 들었대요. 비상, 창공이란 말에서 펼쳐지는 이미지들이 있잖아요.” 창공을 비상하는 전투기는 저 멀리 지평을 향해 멋들어지게 날아가겠지만, 영화는 후반 작업을 하는 사이 제목을
촬영은 대구에 있는 공군 기지에서 했다. “안 그래도 더운 지역에서 나무 그늘 하나 없는 활주로에 있자니, 오븐 안에 있는 기분이 이렇겠구나 했다니까요.” 비주얼이 화려한 영화이니 만큼, 전투기를 빼놓을 수 없다. 유준상과 정지훈은 ‘이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이걸 타보겠어’ 하는 심정으로 F15K를 경험했다. 돈 주고도 못 할 경험인데, 겁이 많은 신세경은 구경만 했다. 대신 자신의 역할인 정비사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공군 기지를 수없이 출입하며 정비사들을 만났다. “세상에 뭐 하나 얕은 직업이 없어요. 정비사는 예상보다 더 집요한 직업이었어요. 비행사는 비행할 때마다 목숨 걸고 하는 셈이고, 그 목숨을 정비사가 쥐고 있으니까요.”
정확히 1년 전, <보그> ‘15인의 여배우 특집’에 나온 신세경 인터뷰 제목은 ‘불순물 한 점 없는’이었다. 신세경은 1~2년 전에 했던 인터뷰만 봐도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밝아 보인다고 했다. 오늘, 신세경은 우스갯소리로 ‘이젠 불순물이 좀 생겼다’고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갖가지 말과 반응을 흡수하다 보니 조금 더럽혀졌다고. “나중에 제 딸이 배우 한다고 하면 절대 반대할 거예요. 그래도 하겠다고 우기면 다리를 부러뜨려 버려야지. 배우의 삶이란 소를 푸른 초원에 방목하는 게 아니라, 요만한 우리에 가둬놓고 마른 풀 먹이면서 키우는 꼴 같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나 이런 말들을 하면서, 또 ‘회복’의 한 방법으로 요즘 몰두하고 있는 요리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리는 신세경을 볼 때면, 그녀의 말대로 다시 1~2년 후 다른 인터뷰에선 전혀 다른 말들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세경의 웃음 소리는 ‘하하하’보다 ‘깔깔깔’로 써야 어울린다. 깔깔깔 웃으며 자유롭게 날길 바란다고 말을 건네려는 순간, 신세경이 먼저 말했다. “인기로만 치면 <지붕 뚫고 하이킥>을 하던 때보다는 지금 아래로 내려온 상태일 거예요. 그 사실이 제 숨통을 트이게 해준 점도 있죠. 지금이 과도기라고 생각할래요. 다른 배우와 어른들도 이런 시기를 거쳐 나이 들었겠죠?”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김제원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서정은, 헤어&메이크업 / 김주희, 김활란(김활란 뮤제네프), 세트스타일리스트/이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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